-
페드로는 카메라 꾸러미와 단출한 짐을 들고 칠레의 낯선 섬에 들어선다. 페드로는 웨딩 사진을 찍기 위해 외진 곳까지 찾아들어왔지만, 어쩐 일인지 그를 기다리는 건 꼬마신부뿐이다. 신랑은 보이지 않고 계약 종료일로 약속되었던 결혼식 일정도 기약 없이 차일피일 미뤄진다.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영화는 첫 단추를 잠근 뒤로 점점 역사적인 이야기로 흐름을 넓혀 간다. 페드로는 사적인 사건의 보조적인 역할에서 폭력의 연출가로 변모해 간다.
다큐멘터리 영화라 해도 좋을 만큼 풍광이 아름답게 담긴 영화다. 그런데, 화이트 온 화이트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양 위에 떳씌운 하양. 설원 위를 덮는 짙은 운무(雲霧)? 겨울 풍경 속에서 운무 하나가 걷히면 다른 운무가 뒤따라온다. 아니면 새하얀 인화지? 백지였던 인화지를 화학용액에 담근 뒤 좌우로 조심스럽게 움직이면 프레임속 인물의 윤곽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등장인물들의 의상? 촘촘히 주름잡힌 꼬마신부의 은백색 웨딩드레스와 파자마. 아니다, 표백! 문명의 표백이다. 새로운 것이 오래된 것을 축출해내는 방식의 문화적 표백. 서구인에 의한 인디언 세계의 파괴. 아주 야만적인 표백.
영화 속 인물들은 부차적인 존재이든 무게감 있는 존재이든 역사에서 하나의 기록으로 남기를 원한다. 페드로의 사진기와 필름은 그러한 기록 수단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처음에는 사진의 프레임 안에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담긴다. 수수한 농민들, 부루퉁한 표정의 아낙네들, 모피옷을 두르고 장총을 둘러멘 사냥꾼들. 그러나 때로 프레임 안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욕망들이 담긴다.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꼬마신부의 헐벗은 사진들. 소리 없는 폭력은 먼저 가장 힘없고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린 아이, 여자들, 야생동물. 그 야만적인 광기는 페드로가 담는 마지막 프레임에 여과없이 담긴다. 그 안에는 도륙되어 발가벗은 인간 존재와 자신의 완력(腕力)에 대한 득의양양함과 허영심으로 가득한 인간 존재가 동시에 담겨 있다.
카메라의 프레임이 비추는 화면은 무엇이 야만이고 무엇이 문명인지에 대해서 보는 이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칠레의 풍광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지만, 그 위에서 벌어지는 야만인과 문명인간의 촌극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인다. 촌극이 벌어지는 무대 위에는 인간의 언어들이 튀어나오고 인간의 쾌락이 춤추고 인간의 나약함이 부대낀다. 은빛 눈가루와 건조하게 메마른 관목들, 날카롭게 뻗은 산등성이, 잿빛 냇가들, 늑대 같은 사냥개들, 앙상한 활엽수림이 묵묵하게 그러한 인간의 외침을 버텨낸다.영화의 후반부에는 흰 깃털을 듬성듬성 두른 새하얀 외계 생물체가 등장한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임계치(threshold)에 다다르는 듯하다. 유유히 외계생물체가 수풀 뒤로 사라진 뒤 본격적인 살육의 무대가 벌어진다. 영화 내내 피를 겁냈던 페드로는 이 대목에 이르러 대담하게도 '사냥꾼'들을 다그쳐가며 그들의 폭력성을 각성시킨다. 그는 이제 방관자도 아니고 소극적인 조력자도 아니다. 그는 이 역사적인 한 장면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연출가이자 야만적인 역사적 인물이다.
화이트 온 화이트. 결국은 서로 다른 두 개의 하양이 존재하는 셈이다. 하나는 순수성과 원시성에 가까워 어떤 색이 섞여도 곧바로 오염되는 투명함이다. 다른 하나는 무결함을 가장한 야만성과 모든 것을 말소해버리는 무자비함이다. 그런데 결국 하양 위에 하양이 겹쳐도 여전히 색깔은 하양이다. 순수성 위에 야만성을 덧칠해도 하양이고, 원시성 위에 문명을 입혀놓아도 원래 그대로의 하양이다. 결국 역사라는 것은 타자에 의해 지워지는 또는 타자를 지우는 반복적인 행위인 것일까? blanco en balanco. Es la misma historia.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초기작 <키네타>, <송곳니>, <알프스> 같은 작품이 가졌던 느낌을 예상하면서 봤던 영화다. 크리스토스 니코우 역시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뒤를 잇는 현대 그리스 영화감독으로 곧잘 묘사되기도 한다. 또 영화의 주인공을 연기한 아리스 세르베탈리스 역시 일찍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작품 <알프스>에 출연한 바 있다.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애플>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양식을 생소한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초기작과 공통분모가 매우 많은 작품이다. 크리스토스 니코우의 영화에서도 사람들의 기억은 분절되고 일반 사람들의 통념과 동떨어진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동작이 쉼없이 조명된다.
하지만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크리스토스 니코우의 작품세계가 공유하는 교집합이 많다고 해서 니코우의 작품을 란티모스의 작품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란티모스는 때로 아주 급진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말과 행동을 해체하고 분해한다. 인물들이 기존의 어휘에 전혀 다른 정의(定義)를 내리고 어떠한 각본에 따라 모의연습에 몰두하는 <키네타>와 같은 작품이 그러한 경우다. 이 작품은 내용도 실험적일 뿐만 아니라 촬영방식도 실험적이어서 영화 속에 담긴 많은 것들을 본말전도시켜서 바라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반면 니코우는 말과 행위 사물을 해체해서 나열한 다음 관객들이 생각해 보게끔 하기 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좀 더 쉽게 읽힐 수 있는 방식을 택한다. 예를 들어 영화에는 '사회화'에 대한 내용이 비중있게 다뤄지는데, 이는 란티모스의 작품에서는 그리 부각되지 않는 주제다.음악 <징글벨>을 들어도 가족들이 모인 크리스마스를 떠올리지 못한다. 또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들어도 우아한 발레 동작을 연상하지 못한다. 음악이란 비언어적인 것이고 멜로디와 리듬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은 어떠한 약속들에 기초해 있다. 약속하기에 따라서 <징글벨>은 블랙 프라이데이를 알리는 쇼핑몰의 입장 안내가 될 수도 있고, <백조의 호수>는 팀북투에 울려퍼지는 레퀴엠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통념 또는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허점을 읽게 되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기억이 지워졌다고 해서 그들이 두 발 딛고 서 있는 세계의 모든 것이 부정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무의식'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 자신의 선호 대로 오렌지보다는 사과를 집어들고, 트위스트 음악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그에 걸맞는 춤을 춘다. 또한 <Sealed with the kiss>라는 선율이 흘러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노랫말을 흥얼거린다. 설령 그 말의 본뜻은 모른 채이더라도 말이다.그들을 다시 원래의 삶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는 재사회화가 필요하다. 재사회화에는 두 가지 도구가 쓰인다. 하나는 매뉴얼 스크립트이고, 다른 하나는 폴라로이드 사진기다. 재활시설에서 받은 매뉴얼에 따라서 등장인물들은 '원래 뜻'을 모른 채 어떤 활동들에 가담한다. 그리고 그들이 활동했던 기록들을 필름으로 남겨 놓는다. 그렇게 그들이 삶에 부여하는 의미, 삶을 이어나가는 동기와 목적은 외부로부터 구축된다. 물론 등장인물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런 활동들의 부자연스러움과 위화감을 느낀다. 마치 란티모스의 작품 <송곳니>에서 큰딸이 자신의 송곳니를 망치로 내리찍었 듯이, 아리스는 사회화라는 프로그램에서 빠져나올 시기에 가까워진다.
한 가지 가장 큰 아이러니는 아리스가 마침내 되돌아간 옛 일상도 결국은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와, 자신의 테이블 앞에 앉아, 먼지 부스러기를 한쪽으로 밀어낸 뒤 사과를 깎는 아리스. 과연 기억을 잃기 전과 잃은 후의 아리스가 다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억을 잃기 전과 기억을 되찾은 후의 아리스가 서로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아리스라는 존재는 어디까지가 그 자체이고 어디까지가 사회로부터 이루어진 것일까?<화이트 온 화이트>와 <애플> 모두 카메라와 필름은 핵심적인 도구로 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포스팅의 제목을 '필름들'로 간단히 달아 보았다. 두 영화 속에서 카메라는 프레임을 통해 등장인물을 최대한 객체화하여 관객에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셔터가 눌리는 사이사이를 메우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에 집중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두 영화에서 공통적인 것 또 한 가지는 필름으로 남은 것만으로는 어떤 존재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번의 셔터가 눌리고 그 다음 번 셔터가 눌리기까지의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나의 행위, 너의 행위, 나의 말, 너의 말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fin]
'일상 >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편의 킬링타임 (0) 2021.07.07 존재의 경계 (0) 2021.06.27 티끌 같은 죽음의 무게 (0) 2021.05.22 See You Down The Road (0) 2021.05.06 너와 나의 분노(une société en colère) (0) 2021.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