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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일본 영화일상/film 2021. 8. 16. 17:51
ゴンドラの唄 /곤돌라의 노래いのち短し、戀せよ、少女、/삶은 찰나의 것, 사랑을 하오, 소녀여
朱き唇、褪せぬ間に、/붉은 입술, 시들지 않는 동안에
熱き血液の冷えぬ間に /뜨거운 피, 식지 않는 동안에
明日の月日のないものを。/내일의 시간이란 없소
いのち短し、戀せよ、少女、/삶은 찰나의 것, 사랑을 하오, 소녀여
いざ手を取りて彼の舟に、/자, 손을 맞잡고 그의 배에
いざ燃ゆる頬を君が頬に /자, 타오르는 뺨에 그대의 뺨을
こゝには誰れも來ぬものを。/여기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터
いのち短し、戀せよ、少女、/삶은 찰나의 것, 사랑을 하오, 소녀여
波にたゞよひ波の様に、파도에 떠도는 파도처럼
君が柔手を我が肩に /그대의 부드러운 손을 내 어깨에
こゝには人目ないものを。/여기에는 보는 이가 없으니
いのち短し、戀せよ、少女、/삶은 찰나의 것, 사랑을 하오, 소녀여
黒髪の色褪せぬ間に、/검은 머릿빛이 옅어지지 않는 동안에
心のほのほ消えぬ間に /마음의 불꽃이 사라지지 않는 동안에
今日はふたゝび來ぬものを。/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 다는 것을..
이키루(生きる). <살다.> 모처럼 본 일본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의 작품이었다. 1952년도에 발표된 작품이다. 서류더미에 파묻혀 반복된 일상을 보내던 한 노년 남성이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겪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흑백영화이고 음향이 지금보다 좋을 리 없지만, 소장해 두었다가 언제라도 찾아보고 싶은 영화가 되었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죽음을 앞둔 주인공 와타나베가 삶의 덧없음에 괴로워 하는 장면이 전반부를 차지한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삶의 마지막을 불태우는 와타나베의 모습이 담겨 있다. 영화의 전반부에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차용한 모습도 언뜻 엿보인다.
예컨대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찾아간 이자카야에서 와타나베는 무명의 작가를 마주한다. 작가는 자신을 ‘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가 계약을 맺는 악마)’라고 소개하는데, 이 술집에는 마침 ‘검은 개(악마가 변신한 동물)’ 한 마리가 살고 잇다. 이후 메피스토펠레스가 와타나베에게 선사하는 삶의 말초적 즐거움은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를 따라간 파우스트가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쾌락의 끝을 발견한 것과 맞닿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영화에서 ‘노구치’라는 젊은 여성은 『파우스트』 속 ‘그레첸’에 연결지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악마(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 이후 파우스트는 홀린 듯 그레첸에게 구애한다. 마찬가지로 와타나베는 사막 같은 자신의 인생에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듯 노구치에게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을 종용한다. 한때 시청에서 부하직원으로 데리고 있던 노구치라는 젊은 여성은 생(生)의 기운을 발산하는 인물이다. 노구치는 사무실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직장을 나선 재기 넘치는 여성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파우스트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결이 다른 두 번째 이야기로 이어진다. 사실 이 후반부가 가장 인상 깊었다. 후반부에는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이 뚜렷하게 구분되기 시작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와타나베의 개인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의 죽음은 대단히 쓸쓸한 것이었다. 그는 한 평생 바라보고 살아왔던 아들로부터도 냉대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공적인 영역에서 더 쓸쓸하게 다뤄진다는 점에서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한 삶의 떫은 맛에 무뎌지는 것이다.
그가 죽기 직전 이루었던 공적은 보란듯이 다른 권력자의 공적으로 치하된다. 그와 같은 부서에서 일했던 동료와 직원들은 죽기 직전 그의 업무적인 열정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정신을 기리면서도, 다시 평범하고 무익한 업무로 아무렇지 않게 되돌아간다.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소수의 시민들뿐이다. 그런 그들도 일상에 치이며 살다보면 언젠가는 '와타나베'라는 이름을 영영 잊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삶은 그렇게 짧고 덧없이 마멸되어 가는 것이다.
<동경이야기>는 <이키루>가 발표된 이듬해에 나온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흑백영화이고 1950년대 일본의 풍경이 잘 담겨 있다. 히로시마의 오노미치에 살던 히라야마 노부부가 도쿄에 살고 있는 아들딸들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키루>만큼이나 마음이 퍽 쓸쓸해지는 영화다.
같은 50년대 영화이면서도 <이키루>와 차별화되는 <동경이야기>의 시대・문화적 특색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노부부의 토속적인 말투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간사이벤에 가까운 히로시마 사투리를 쓰는 노부부의 말투는 끈덕지면서도 정감이 있다. 반면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 정착한 자녀들은 비교적 표준적인 말투를 구사하는 편이다. 그리고 부모 자식간의 거리는 심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처럼 언어적인 면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점은 ‘전후 상황’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히라야마 노부부의 둘째 아들 쇼지는 전쟁에 징집된 이후 8년째 연락이 두절되어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발표된 것이 1948년의 일로, 전후 일본인들의 염세주의적인 세계관이 영화와 문학 모두에 스며들어 있다. 사실 히라야마 씨의 친구 핫토리가 남는 방에 세를 주고 있는 젊은 법학도가 영화에 잠깐 등장하는데, 『인간실격』의 주인공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공부는 하지 않고 도박과 유흥에 빠져 지내는 점이 비슷하다.
여하튼 <동경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가족 이야기다. 히라야마 노부부는 어렵사리 도쿄까지 길을 나섰지만, 자식들로부터 환대받지 못한다. 큰 아들 코이치는 부모의 뒷바라지 덕분에 의사로서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지만, 부모에게 시간을 할애하기를 피한다. 또한 누이인 시게의 제안에 따라 노부부를 온천 여행 보내는 데 합의한다. 부모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서로 위안을 삼지만, 사실 히라야마 노부부는 온천 여행에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아타미에 자리잡은 예의 온천은 사실 느긋한 휴양지가 아니라, 젊은이들이 환락을 즐기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셋째 아들 케이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오사카에 자리 잡은 그는 부모의 존재를 성가시게 여길 뿐 아니라, 히라야마 토미(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 오노미치에 가장 늦게 모습을 나타낸다. 그런 자식들에게 노년의 부부는 꾸짖거나 나무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다만 둘만의 대화에서 ‘시게는 어릴 때 더 상냥했었는데…’, ‘코이치도 어릴 때 더 상냥했었는데…’하고 읊조리는데, 그런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날 뿐이다. 그리고 그게 부모의 마음인 걸까 헤아려볼 뿐이다.
영화에는 도쿄에 온 히라야마 슈키치 씨가 오래된 지인들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핫토리(服部) 씨 그리고 누마타(沼田) 씨와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노년의 남성들은 서로 신세 한탄을 한다. 핫토리는 자식들을 전쟁으로 모두 잃었다. 누마타는 전쟁통에 다행히 자식들이 모두 살아남았지만 자신을 거들떠 보지 않는다 울분을 터뜨린다. 핫토리와 누마타는 그러면서 히라야마야 말로 복받은 사람이라고, 요즘 세상에 도쿄에 온 부모를 살뜰히 모시는 자식들이 어딨냐며 추켜세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말을 삼키던 슈키치는 자신의 처지라고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밤새 술을 들이킨다.
오히려 이들 히라야마 노부부를 가장 위하는 것은 둘째 며느리 노리코(紀子)다. 이 둘째 며느리는 영화에서 단연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다. 노리코는 꾸밈없이 진심으로 노부부를 대한다. 둘째 아들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된지도 어언 8년이 되었지만, 그 뒤에도 영화 일을 하며 혼자 살림을 꾸며 나가는 노리코는 히라야마 노부부에게는 고마우면서도 측은한 마음이 들게 하는 인물이다. 영화의 끝에는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는 언니 오빠들을 보며 진저리를 내는 쿄코—히라야마 노부부와 오노미치에서 같이 살던 막냇딸—에게 모두에게는 각자의 삶이란 것으며 누구를 탓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다독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노리코 그녀 자신이야말로 지혜롭고 용기 있는 인물이다.
노리코와 슈키치의 마지막 대화에서 노리코 본은 자신이 사실 못된 사람(ずるい)이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훔친다. 그런데 사실 살다 보면 옆에서 보기에 정말 못됐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법이다. 자기 내면의 나약함과 불안, 외로움을 인정하고 드러내보이는 그녀야 말로 차라리 믿을 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야말로 가족의 의미를 더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런 이야기들에 공감하는 정도가 달라진 나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終]'일상 >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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