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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일상/film 2021. 8. 23. 18:54
요즘 같은 시국에 이런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지 못한다는 건 참 아쉬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상영작은 아니지만 말이다. 코로나 국면이 오래 가면서 영화관을 가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요즘은 부쩍 그렇다. 그래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관에서 감상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운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면 그 아쉬움이란 게 뭘까 싶기도 하다. 집에서 본다고 해서 영화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배우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암실 같은 공간에 느긋하게 앉아 커다란 스크린으로 원하는 영화를 본다는 의미가 큰 걸까. 그렇다면 영화관이 관객에게 주는 것은 분위기 정도쯤으로 봐도 될까. 잘 모르겠다. 적어도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초반에 집중을 잘 못했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자기 전 태블릿 PC를 켜고 영화를 보는데 몰입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맞은편 아파트를 훔쳐보는 남자 주인공 토메크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다른 영화에서 봤던 캐릭터 같기도 하다. 그만 보고 잠을 청할까 생각하는데 이야기가 점점 전개되었다. 망원경 속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소년, 우체국에서 그녀를 상대하며 겸연쩍어 하는 소년, 실연으로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며 '아픔'이란 무엇일까 물음표를 던지는 소년. 영화를 보는 사이에 영화 속 이야기는 소년의 일탈에서 관계에 대한 갈망으로 발전해 갔다.
영화를 보면서 불현듯 떠올랐던 건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작품 <피아니스트>였다. 아마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의 토메크와 <피아니스트>에서의 에리카가 서로 닮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토메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한밤이 되면 맞은편 건물의 여성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는 앳된 소년이다. 반면 에리카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대학교수로 대외적으로 고상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중년의 여성이다. 언뜻 닮은 점이 없어 보이는 이 둘의 공통분모는 '부재(不在)'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관계의 부재'.
토메크와 에리카는 관계 속에서 안전함을 느낀 적이 없는 인물들이다. 그들 자신은 상대(토메크는 마그다를, 에리카는 월터를)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신만의 방식을 강요한다. 때문에 그들이 관계 형성에 접근하는 방식은 보는 이로서는 기괴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이들의 행동에는 배려, 따스함,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 <피아니스트>에서 에리카가 집착했던 월터라는 전도유망한 소년은 마침내 선생에게 저항함으로써 파국을 맞는다. 그리고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토메크의 관찰대상이었던 마그다라는 여성은 소년의 렌즈를 통해 관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함으로써 열린 결말을 맞이한다. 토메크의 전유물이었던 망원경은 어느새부터인가 마그다의 손에 쥐어져 있고, 마그다는 자신이 거쳐온 사랑과 소년과의 관계에 대해 천천히 반추한다.
1988년도에 발표된 영화다. 그래서 내심 놀랐던 것이 당시 폴란드는 공산주의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폴란드는 1989년이 되어서야 공산 진영에서 탈퇴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예술은 뚜렷한 목적을 지닌다. 표현의 자유보다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이 점에 비추어볼 때,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나 표현방식은 분방하고 신선해서 시대상황을 한참 벗어난 느낌이 든다. 1980년대 영화이지만 2021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고, 그러한 메시지를 한 소년을 통해 선명하게 던지는 영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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