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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멕시코 감독일상/film 2021. 8. 28. 00:17
이번에 포스팅하는 두 편의 영화는 '멕시코 감독'이 만들었다는 것 이외에 공통점이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아이들'이 핵심소재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특히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멘>에서는 2027년 여성들이 임신능력을 잃어버린 세계를 그리고 있어서, 얼마전 읽었던 일본소설 『헌등사』가 어렴풋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헌등사』에서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아이들의 신체능력이 허약해져서 인공호흡기나 거치대의 도움없이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래서 <칠드런 오브 맨>과 『헌등사』 두 작품 모두 아이들이 부재하거나 고통을 겪는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끌었던 건 런던 시내도로에서 사륜 자동차들 사이로 분주히 달리는 릭샤들이다. 지금도 런던은 인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지만, 2027년에는 런던에서 인도적인 색채가 훨씬 강해진다. 이주민이 본국에서 향유하던 삶의 양식이 런던 한복판에 깊숙이 파고들 만큼 영국인의 '정체성'이 위협받게 되리라고 암시하는 것 같다. '불법이민자'는 영화에서 큰 뼈대를 이루는 소재로, '불법체류자를 발견하는 즉시 신고하라'는 안내 문구가 영화에 수시로 등장한다. 어쨌든 디스토피아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런던 거리에 릭샤를 넣겠다는 생각은 기발한 것 같다.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에는 화면에 담기는 아주 작은 부분,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장면까지도 세밀하게 신경을 쓴 게 느껴진다.
또한 2027년의 디스토피아는 '안락사'를 장려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Quietus라는 안락사 약을 쉽게 구입할 수 있고, 생활 공간 곳곳에 상비약처럼 구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2027년도에는 혼란과 무질서가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관점도 바뀌어 간다. 영화가 발표된 게 2006년도인데 사실 2021년도 시점에서 2027년도는 그리 먼 미래도 아니다. 이런 상황을 통제하기 위한 정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역할은 해안가에 설치된 수용소를 관리하거나 이민자 추방을 추진하는 정도뿐인 것 같다. '물고기파'와 같은 지하세력들이 저마다 위세를 떨치며 행정력을 마비시키곤 한다. 공동체는 완전히 와해된 상태다.
출산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란 어떤 세상일까? 아이가 사라진 세상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전세계 최연소자가 스타덤에 오르는가 하면, 최연소자의 사망 소식이 전세계에 전파되자 시민들은 진심어린 애도를 표한다. 불과 며칠 전 읽었던 스티븐슨의 수필에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삶(life)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living)"이라고. (p.35,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진부한 이야기지만,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 존재이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살아간다. 마지막에는 죽을 목숨인데도 지금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다는 건 대단한 아이러니다. 그 구절을 떠올려 보면 '아이(children, niño)'는 '살아가는 것(living, viviendo)'을 완성시키는 존재다. 삶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주는 존재다.
삶은 연약하고 가련하다. 하지만 그 노정은 끈질기고 치열하다. 키(Kee; 유일하게 출산가능한 묘령의 여인)는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낳은, 이제 갓 세상의 빛을 본 딸을 필사적으로 수호한다. 결국 살아간다는 건 여러 기만과 술책, 위협 가운데에서, 주위에 어떤 위험이 도사린지도 모른 채 견뎌 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아이가 사라진 세상이라는 것은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사라진 세상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모처럼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작품을 봤다. 이냐리투의 작품은 예상했던 것보다 버거울 때가 많은 것 같다. 원래 심각한 분위기의 영화를 잘 보는 편인데도 그렇다. (예를 들면 <에모레스 페로스>나 <버드맨>이 그렇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마치 투견장에 갇혀서 상처입고 헐떡이며 숨을 고르는 개처럼 묘사된다. 영화제목은 <비우티풀Biutiful>이다. 제목대로라면 인생은 아름다워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영화제목 속 틀린 철자는 아름답다는 형용사(beautiful)을 조롱하는 동시에, 우스발이라는 남성이 감내해야 하는 혐오스런 삶을 암시한다.
<칠드런 오브 맨>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아이들'은 구심점 역할을 한다. 하지만 <칠드런 오브 맨>과는 맥락이 같은 듯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영화는 두 아이에게 비루한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남성(우스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작 우스발 본인은 불법적인 사업에 몸담고 있지만. 밀입국자를 염가의 인건비에 사업체에 알선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이 그의 삶이다. 하루는 우스발에게 매수되었던 경찰이 우스발에게 말한다. 밀입국자를 감싸고 도는 것은 '굶주린 호랑이(tigre con hambre)'를 키우는 것과 똑같은 격이라고. 굶주린 호랑이는 보살핌을 받고 나면 자신을 보살펴준 이를 잡아 먹는다. 그렇다, 우스발은 불법적인 사업을 벌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인물인 것이다. 그는 밀입국자를 이용하면서도 그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아버지에 대한 우스발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의 유년시절은 그리 순탄치 않았고, 우스발-티토 형제가 그처럼 지저분한 지하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이유도 이해가 간다. 그런 우스발이 자신이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빌었던 것은, 단순히 아이들에게 빈곤을 물려주지 말아야겠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기억'되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의 추억 속에 잊혀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 자신이 평생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부재로 인해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프랑코의 독재를 피해 멕시코로 떠난 그의 아버지는 우스발의 머릿속에 하나의 서사로만 남아 있을 뿐 형상은 거의 잊혀졌다. 영화의 도입부와 종반부의 눈덮인 숲속에서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마주하는 것이 전부다. 영화에는 "부엉이는 죽을 때 털뭉치를 뱉어낸다"는 내러티브가 두 번 등장한다. 한 번은 우스발의 아버지의 입을 빌려서, 한 번은 우스발의 딸의 입을 빌려서. 이는 어떤 존재가 삶에 끝을 고하더라도 어떠한 형태로든 부산물이 남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누군가의 죽음이 지나간 뒤에도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은 털뭉치처럼 고스란히 남는다.
이냐리투 감독의 기발한 연출 가운데 하나는 '천장(ceiling)' 또는 공중을 여러 차례 활용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터 천장에 검버섯처럼 얼룩 형상을 그리는 시커먼 나방들이 등장하는데, 영화가 후반부로 흘러갈 수록 나방의 개체수가 늘어가고 영화의 음산한 분위기가 깊어진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우스발의 환영을 투영한 것으로, 이후 창고에서 숙식하던 중국인 밀입국자들에게 변고가 발생했을 때에도, 이헤(Ige)가 우스발의 돈을 챙겨 떠나갔을 때에도, 죽은 자들 또는 떠난 자들이 천장에 섬뜩하고 기괴한 환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하지만 동시에 너무 작위적이었을 수도 있었던 장면—은 바르셀로나의 어느 다리를 가로지르면서 마람브라(우스발의 아내)에게 아이들과 눈을 보러 피레네 산맥으로 가자고 통화한 다음 장면이다. 하늘을 올려다본 우스발의 눈 앞에는 한 무리의 새들이 저물녁 공중을 무대 삼아 곡예하듯이 군무를 춘다. 몇 번이나 수직으로 낙하하고 상승하고 새 무리들은 이내 시야에서 벗어난다.
이 영화에서 주연 배우인 하비에르 바르뎀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저열한 공모에 가담하면서도 심한 내적 갈등에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불안정안 아내(마람브라)에 진저리를 내면서도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관계를 고쳐나가고, 죽어가면서도 기억되기를 갈망하는 우스발이라는 캐릭터는 배우의 좋은 연기가 따라주지 않았다면 결코 잘 표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냐리투의 좋은 연출뿐만 아니라 바르뎀의 내공 있는 연기가 있었기에 우스발의 일생을 살아보지 않았음에도 그의 고뇌에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단지 타인의 비극이 아니라 내 삶의 한 구석에 이런 비열한 면과 고상한 면이 맞붙어 있는 건 아닐까 헤어려볼 수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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