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래에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연작을 봤다. 다해서 <세 가지 색: 블루, 화이트, 레드>의 세 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이 연작에서 차용한 색깔들은 프랑스 국기에 쓰이는 삼색(la tricolore)과 같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색깔을 프랑스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와 연결짓는 것도 생각해볼 법한 일이다. 하지만 막상, 각 영화가 자유(liberté), 평등(égalité), 박애(fraternité)와 관련이 있었던가 되짚어보면 그리 말끔히 생각이 정리되지는 않는다.(=_=)
<세 가지 색> 연작은 수상 이력이 대단히 화려한 영화들이기도 하다. <블루>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화이트>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감독상)을, <레드>는 칸 영화제에 초청되고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으니, 영화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진기한 기록이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도 등장한다. 줄리엣 비노쉬와 줄리 델피가 그렇다. (그러고 보면 프랑스 영화에서는 여배우들이 기억에 남는 편이다.) 그리고 이렌느 야곱은 <레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마찬가지로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인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먼저 참여했기 때문에 언젠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세 가지 색> 연작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도 종종 재개봉되는 것을 보곤 한다.)
이들 연작을 보면서 맨처음 특이하다고 느끼는 점은 <화이트> 정도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영화에 프랑스어가 쓰인다는 점이다. <화이트>에서는 폴란드어가 주를 이루지만 여주인공 줄리 델피가 등장하는 장면에는 여지 없이 프랑스어가 쓰인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폴란드 출신이고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역시 폴란드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들 영화가 프랑스어로 제작된 배경이 조금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90년대 이후부터 프랑스어로 만들어진 영화가 등장한다. 아마도 그가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가면서 프랑스로부터 후원을 받아 만들어진 게 이 연작이 아닌가 싶다.
사실 세 편의 영화를 보며 그의 수상 이력을 들여볼 때만큼 경탄하면서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유럽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성 가득한 서사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쫓으며 머리를 식힌다는 생각으로 별 생각없이 영화를 보았다. 그럼에도 세 편의 영화에서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한 번 정리해보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먼저 <블루>. <블루>라는 이름을 달았다고 해서 영화 안에 너무 파랑이 많이 등장한다면 분명 작위적인 느낌이 들 것이다. 물론 ‘파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 때문에 파랑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하지만 집중을 흐릴 정도는 아니다. ‘파랑’이라고 할 때 내게 먼저 떠오르는 건, 우울함, 청량감, 창발성, 차가움 등등의 느낌이다. 그리고 영화 속 이야기는 파랑이 주는 느낌과 아주 잘 어울린다. 남편을 사고로 떠나보낸 줄리(쥘리엣 비노쉬)라는 주인공이 과거를 하나둘 말끔히 말소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곡가였던 남편의 유작 나머지를 완성해 나가는 이야기가 병행되는데, 영화 속 음악 또한 인상적이다.
그런데 자유? <블루>, 그리고 자유와 관련해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자유’를 딱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자유’라는 것을 먼저 정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자유’란 ‘취하는 순간 그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라 정의해보고 싶다. 줄리는 굳이 삶의 ‘자유로움’이라고 명명해가면서까지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순간순간을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만큼 수용하면서 흘려보낼 뿐이다. 남편의 내연녀였던 상드린이 사랑할 자유, 이웃집에 사는 루실이 일탈할 자유, 그러한 것들도 자유라 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책임과 의무가 구속력을 갖게 된다는 동의어이기도 하다. 줄리는 그러한 그들의 자유를 용인하고, 자신이 감내하려는 자유와도 정면으로 마주한다.
다음으로는 <화이트>다. 영화에는 순백색이 여러 가지 방식—하얀 드레스, 폴란드의 설원, 대리석 조각상 등—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색의 특성상 화사하고 밝은 ‘빛’이 유독 많이 쓰인다. 빛이 강렬해 내리쬐어 눈이 부신 야외 장면들이 그러하다. 그런데 세 편을 다 보고난 뒤 지금에 와 생각을 해보면, <화이트>에서의 이야기 전개가 가장 난해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미니크(줄리 델피)는 수감소 안의 마지막 장면에서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일까?
이야기의 개연성에 궁금증이 읾과 동시에 ‘평등’이라는 모티브로 되돌아오게 된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연작에서 차용되고 있는 자유, 평등, 박애 개념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 부르짖었던 것처럼 사회적이고 규범적인 의미를 띤다고 보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서사를 들여다보기 위한 렌즈로써 쓰이는 개념들이고, 따라서 맥락과 상황에 따라서 해석하고 이해하기 나름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내가 <화이트>에서 간추릴 수 있는 평등 개념은 ‘죽음 앞에서의 절대적 평등’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카롤을 구해준 은인, 미콜라이가 살인해달라고 사주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미콜라이 본인인 것이 밝혀지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또 생각해보면, 도미니크가 카롤의 진심어린 사랑을 깨닫는 장면도 카롤이 연출한 가짜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 속에서는 달콤하거나 씁쓸한 러브스토리보다 죽음에 관한 암시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끝으로 <레드>. 나는 이 <세 가지 색> 연작 가운데 빨강의 사용이 단연 가장 마음에 든다. 아주 진하고 고혹적인 빨강. 도발적이고 애절한 빨강. 빨강은 파랑이나 하양과는 다르게 도저히 은은히 사용할 수 없는 색이다. 어디에 배치하든 확연히 눈에 띈다. 빨간색 차, 빨강 신호등, 빨간 간판, 빨간 피. 영화의 주인공은 발렌틴(이렌느 야곱)이고, 이웃집에 사는 오귀스트라는 청년의 이야기가 날실과 씨실이 겹치듯 묘하게 교차한다. 오귀스트가 연인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플롯은, 발렌틴이 어느 퇴임 판사(장-루이 트렌티냥)가 연인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던 옛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레드>를 통해 서술되는 박애 개념은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 편이다. 두루뭉술하게 ‘박애’를 인간애의 한 형태로 본다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들은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하나씩은 아주 작은 형태로나마 존재한다. 발렌틴에게 관계의 어려움은 가족 안에서 발생한다. 때문에 매일매일 스쳐지나갈 뿐인 인연일 뿐이었던 오귀스트를 선상에서 실제 마주했을 때, 이미 그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자리잡고 있었던 셈이다. 그들 사이의 유대는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관계에서 오는 고통, 그럼에도 관계를 갈망하는 외로움과 공허함 같은 것이 그 끈을 단단히 조인다. 한편 퇴임 판사는 젊은 발렌틴을 조우하면서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아픔을 응시할 수 있었고, 용해될 것 같지 않았던 아픔의 응어리를 차차 승화시킨다.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가는 사람들. 폭풍으로 인해 난파된 선박에서 구조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고, 박애가 있다. 이는 협애하고 척박한 곳에서도 세 가지의 마음만큼은 건져올려야겠다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메시지인 것일까? [fin]
'일상 >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A comes after Z (0) 2021.10.13 두 편의 양조위(梁朝偉) (0) 2021.09.16 두 편의 멕시코 감독 (0) 2021.08.28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0) 2021.08.23 두 편의 일본 영화 (0) 2021.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