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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mes after Z일상/film 2021. 10. 13. 15:41
이 영화를 본지는 좀 되었다. 기록을 남겨야지 하고 생각만 하다가 3주 정도 시간이 흘러 기록을 남긴다. 영화는 모처럼 신촌에 있는 한 영화관에서 보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기분전환도 할 겸 소규모 극장들을 중심으로 영화가 상영하는 곳을 찾아보았었다. 그리고 신촌에 들를 일을 만들어서 겸사겸사 반 년 만에 신촌으로 향했다.
사실 영화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던 중 개인적으로 충격적이었던 뉴스는 종로3가의 서울극장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었다. 서울극장의 상영시간표는 어떻게 되나 검색을 해보았는데, 아무런 검색 결과도 뜨지 않았다. 코로나 시국이기도 하고 종종 휴관할 수도 있는 일이어서 더 찾다보니 폐관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몇몇 블로그의 제목을 보니 이미 아듀 이벤트까지 한 달 간 진행했던 모양이었다……… 서울극장은 충무로의 대한극장과 더불어 프랜차이즈 영화관이 아닌 곳 중 서울에서 손꼽을 만큼 규모가 크면서도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었어서 너무 아쉬움이 컸다. 코시국에도 몇 차례 서울극장을 갔을 때 200석 가까운 극장에 혼자 앉아 영화를 보면서 극장을 통째로 전세낸 느낌이 마냥 좋다고 생각했었는데—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대체 영화관이 수익을 어떻게 뽑아내나 약간 불안하기도 했었다—결국 수익성 문제로 문을 닫은 게 아닌가 싶다. 이제 같은 건물에 남은 건 서울아트시네마와 인디스페이스 뿐인건가. 스폰지하우스와 시네코드 선재가 문을 닫을 때도 아쉬움이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ㅠㅠ 요즘 ‘상업’ 영화관이라는 게 따로 있겠냐마는, 수익성을 조금 양보하고 다양한 영화를 선보였던 영화관이 줄어드는 건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종종 새로운 소규모 영화관이 개관했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지만, 그런 영화관들이 줄어드는 속도가 새로 생기는 속도보다 빠른 듯하다.
여하간 <아임 유어 맨>은 신촌의 한 자그마한 영화관에서 봤다. 배급사에서는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으로 나왔던 <그녀>와 닮은꼴이라고 마케팅을 하는 듯한데, 분명 소재는 똑같지만 <그녀>는 미국 영화고 <아임 유어 맨>은 독일 영화다. 독일 영화는 확실히 무거운 느낌이 있다. 철학적인 주제들과 블랙 유머들이 많아서 분위기는 두 영화가 사뭇 다르다. 사실 나는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는 AI처럼 최신 기술 가운데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바일 환경이나 플랫폼 경제가 유발하는 사회경제적인 효과가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대체로—특히나 미디어는—기술 변화가 초래할 디스토피아보다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강조하기도 한다. 영화 <아임 유어 맨>은 그런 트렌디한 문제들에 대해 조금 투박하기는 하지만 독일식으로 돌직구를 던진다.
철학을 잘 몰라도,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과연 우리의 로직은 완벽한가, 완벽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독립된 개인이라기보다는 한 사회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인간 개인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의 3요소로 에토스와 파토스, 로고스를 거론했는데, 오늘날 사람들이 기계를 통해 구현하려고 하는 것은 대체로 로고스, 즉 논리의 영역이다. 아무리 로고스가 치밀해도 에토스와 파토스가 결여되어 있다면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수 있다. 사실 0 아니면 1이라는 기계적인 언어 안에 인간의 감정이나 덕성을 위치시킬 수 있는 문법이 존재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분명 야심 있는 과학자나 빅테크 기업에서는 인간의 감성과 미덕까지도 건드릴 수 있다고 호언할지 모르겠다. 요즘처럼 소득뿐만 아니라 모든 의견들이 양극단으로 내달리는 시대에는 차라리 기계를 통해 로고스를 보완하고 인간의 삶에 혁신을 가져오겠다는 첨단기술가들의 주장이 일리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든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이유는 빨주노초파남보가 있기 때문이라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자외선 또는 적외선만 남은 허공에서 인간은 아무런 미(美)도 발견할 수 없다. 두서없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주인공(알마)이 갈등하는 대목은 그런 부분들이다. 기계가 거뜬히 해결해줄 수 있다고 장담했던 합리성의 영역이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불완전했던 인간이 갑자기 완전한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사랑, 결핍, 열정, 욕구와 같은 것들은 이진법처럼 명료하지가 않다. 사랑의 깊이는 시시각각 변하고, 결핍의 골짜기를 메우기 위해 필요한 시간도 저마다 다르다. 마찬가지로 열정은 서서히 식었다가 다른 열정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욕구 또한 쉼없이 대상을 갈아치운다. 석기와 철기의 발달이 인간의 정주 생활을 촉진했지만 전쟁의 규모도 키웠던 것처럼, 로봇도 알고리즘 기술도 하나의 도구라는 측면에서 결국 양가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고뇌에 빠져드는 여주인공의 이름이 ‘알마’—스페인어로 혼, 영혼을 가리키는 단어가 alma—인 것일까.
잔드라 휠러의 영화는 이전에 몇 편 봤는데 뭔가 빵터지는 장면에 잘 어울리는 배우인 것 같다. 영화에서는 로봇을 제공하는 에이전시의 관리자 역으로 잔드라 휠러가 연기하는데, ‘분실’ 상태였던 톰을 다시 알마의 집으로 데려다 놓는 과정에서 삼자대면하는 장면이 가장 웃긴 블랙 유머였다(ㅋㅋ'a')
유행이라고 해도 좇는 편이 아닌데다, <아임 유어 맨>을 본 이후로 영화를 한 편도 못 봤을 만큼 바쁘게 지내느라 <오징어 게임>을 봐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서 접했는지 기억은 못하지만 드문드문 오징어 게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게 도대체 뭔 단어인가 싶었다. 사실 드라마를 다 보고 난 지금도 오징어 게임이라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게임이 우리나라 놀이 중에 있었나?!) 어쨌든 드라마를 정주행한지가 몇 년만인지 모르겠다. 주말에 봤으니 망정이지 9화에서 끝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넷플릭스를 쓰지 않는데 드라마를 보라는 동생의 계정으로 드라마를 보았다. 장면 하나하나가 그냥 잔혹하고 빵터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면에 함축된 의미가 많다. 황동혁 감독이 드라마를 10년 넘게 구상하면서 이가 여섯 빠졌다고 하니…그럴 만도 한 것 같다. 근데 사실 드라마를 보다보면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드라마의 묘미를 완벽히 느낄 수 없겠다 싶은 지점들이 있다. 가령 상우가 기훈에게 ‘선물로 60억을 날렸다’고 할 때, 여기서 선물은 선물(膳物; present)이 아니라 선물(先物; futures)인데 이런 것들은 어떻게 번역이 되었을까? 딱지는 어떻게 번역할 것이며.. 탈북자라는 개념은 이해하기는 할까?(물론 난민이라는 개념은 이해하겠지만 그와는 좀 다르기도 하고..) 게다가 영화에 등장하는 말투만 해도, 경상도 사투리, 북한 사투리, 연변말, 서울말, 이민자의 어눌한 한국어까지 있는데 이런 미묘한 억양 차이를 이해할까? 한미녀, 강새벽 같은 이름은 그 자체로 재미와 뜻이 있는 이름들인데 이런 이름들은 이해할까? 무엇보다 형, 오빠 같은 호칭은 다른 나라에서는 쓰질 않지만 그 말이 전달하는 고유의 정서가 있다. 게다가 어려운 지명들도 많이 나오는 편인데, 해당 지역을 어느 정도 알 때 오는 느낌은 분명 다르다. 번역을 하더라도 각주가 많이 필요한 작품이겠다 싶다.
이런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으레 이런저런 메타포들을 뽑아내는데, 이 드라마에는 기록해두고 싶은 메타포가 많이 있다. 몇 가지 추려서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철저한 ‘계급구조’다. 계급은 드라마 안에서 시각적으로 너무나 적나라하게 잘 구현되어 있다. 최하층 계급이라 할 수 있는 게임 참가자들은 사실상 알몸 상태다. 모든 소지품을 빼앗기고 자신의 소재지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신상이 여과없이 노출된다. 반면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그 안에서 계급이 다시 나뉘기는 하지만, 마스크가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안전함을 누린다. 마스크는 방독면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사회의 위험을 막아줄 안전 장치가 있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노출되지도 않고(신변이 보장되고), 효과적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짓는다(자신들이 상층에 있다는 상징을 전유한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게임의 룰이다. 승자독식의 게임구조이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죽을 수록 적립금은 늘고 ‘덩달아’ 남은 사람들이 챙길 수 있는 적립금도 늘어난다. 물론 어디까지나 ‘확률’의 문제기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때문에 게임 참가자들은 다수결의 법칙을 통해 이 잔혹 게임을 멈출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자중지란에 빠진다(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한 역설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8화에서 최후 3인이 남았을 때이다. 게다가 영화는 ‘절대적 평등’을 강조한다. 물론 게임에서 룰을 어겨가며 재미를 보는 사람도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게임의 장(場)이 일부 오염될지라도 결국 게임이 원래 표방하던 룰로 되돌아가는데, 이때마다 등장하는 표현이 ‘평등’이다. 무서운 레토릭이지 않은가. 사실 이들이 처한 상태는 평등하다기보다는 죽을 확률이나 상금을 탈 확률이 매 스테이지마다 균등하게 조절되는 과정 위에 있다. 또 게임의 주최측은 일부러 자원을 희소하게 만들어서 게임 참가자들 간에 아귀다툼이 벌어지도록 방조한다.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인원수가 줄어들수록, 남은 자들이 더 많은 자원을 누릴 확률이 높아지는 역설적 상황 안에서 참가자들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맴돈다.
물론 이런 말도 안 되는 게임을 관찰하고 고발하려는 정의의 사도도 있게 마련이지만, 이 게임의 ‘구조’ 안에서 그러한 정의 구현은 이뤄지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애들 장난 같은 오징어 게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선 경찰은 없다. 누군가가 게임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해도, 이웃이 그러한 고통을 이해하기에 우리 사회가 이미 너무나 비대해져 있는지도 모른다(사안의 심각성을 공론화할 채널이 충분하지 않다). 일단 게임을 완수하지 못한 사람들은 가차없이 인생에서 퇴장당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죽어나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고, 자신들의 안전감조차 챙길 여유가 없다. 각자의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리는 이들 참가자들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하나하나 인생에서 퇴장당한다.
때로 게임의 주최측은 게임 참가자들의 ‘신뢰’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나마 참가자 집단을 이어주던 관계의 고리는 완전히 끊겨나간다(공동체적인 미덕은 완전히 와해된다). 우리가 통념상 끈끈하고 끈끈해야만 한다고 여겼던 모든 관계가 시험대 위에 오른다. 줄다리기에서 보여준 팀웍은 구슬치기에서 여지 없이 분쇄된다. 게임 주최측은 매우 능란하게 룰을 다룬다. 누구에게도 약해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다친 손은 가려야 하고, 신체적으로 약한 노약자나 여성은 언제나 최우선 기피대상이다. 물론 저 위의 보이지 않는 소수의 누군가가 다수를 제멋대로 휘두른다는 건 어느 상황에나 손쉽게 환원시킬 수 있는 전형적인 음모론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오징어 게임>에는 우리 사회를 묘사하는 일말의 사실적 측면이 있다.
끝으로 '계급구조'와 '게임의 룰' 다음으로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은 ‘인간성’에 대한 부분이다. 일남이 이야기하듯 돈이 넘쳐나서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과 돈이 없어서 장기까지 내놔야 할 판에 있는 사람은 공교롭게도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재미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전자는 하루하루를 끔찍한 권태 안에서 보내는 반면에, 후자는 하루하루를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살아간다. 때문에 전자와 후자 모두 타락한 인간성의 바닥을 여실히 드러내는 게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물론 돈이라도 있으면서 재미가 없는 게 더 낫다고 보지만.) 이들은 게임이 유인하는 말초적인 목표와 유희에 충실할 뿐, 자신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이나 성찰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집단최면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각성 상태에 있는 인물이 그나마 기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잘 모르겠다. 여하간 이 게임 안에서는 모든 가치가 돈으로 치환된다. 장기를 적출하는 것도 결국은 금전적 거래의 한 절차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선택도 삶이라는 계약을 해지하기 위한 과정처럼 보인다. 젊은 간부가 늙다리 게임 참가자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은, 축적된 시간과 세대마저 가뿐히 넘어서는 무차별적인 돈의 속성이 엿보인다.
영화에는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주변부적 존재들이 등장하는 것 같다. 한때는 엘리트였지만 지금은 범죄자가 된 사람, 탈북자, 채무자, 소년범, 폭력배 등등 온갖 군상이 섞여 있다. 이 얼토당토 않는 게임에 456억이 투입되는 건 오로지 권태와 절망 때문인데, 그렇다면 결국 이 게임을 굴리는 것은 마스크에 가려진 인물들이라기보다 그들의 두둑한 주머니, 즉 돈이 아닌가 싶다. 돈은 잘 쓰면 유용하지만, 때로는 오징어 게임에서처럼 아주 난폭하게 폭주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지개의 빨주노초파남보를 모두 지워버리고 인간성을 표백하여 적외선과 자외선만을 남겨 놓는지도 모른다. “보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일남의 마지막 말은, 게임의 운영자와 참여자가 구별되지 않고 존재의 피상성과 맹목성이 판치는 세상에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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