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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틸다 스윈튼일상/film 2021. 11. 27. 21:40
너무 출연진이 화려해서 절로 시선이 갔던 영화다. 한번 볼만하겠다 생각은 했지만, 막상 영화에서 시선을 잡아 끈 건 화면을 가득 채운 아기자기한 미장센들이었는데 영화를 다 본 뒤에야 이 영화의 감독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웨스 앤더슨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화 선택에 정말 대중이 없다=_=) 또 가장 먼저 관심을 끌었던 건 영화에 등장하는 가상 도시 이름이다. 엉뉘 쉬르 블라제(Ennui-sur-blasé). 둔중함(blasé) 위에 지루함(l'ennui)이라니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더 궁금해진다.
영화는 마지막 간행물에 실릴 네 개의 기사와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그 중 첫 번째인 세즈락(오웬 윌슨)의 자전거 도시 탐방기를 보면, 엉뉘 쉬르 블라제라는 공간이 세기말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이 가상의 도시라는 곳이 아마도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기말적인 마을사람들의 모습과는 다르게 도시의 풍경이 너무 예뻐서 원래 배경이 어딘지 찾아보니, 프랑스 남서부의 앙굴렘(Angoulême)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에 만평의 형식을 빌려서 움직이는 만화가 삽입되어 있는데, 앙굴렘이 만화로 유명한 도시여서 영화에 일관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베렌슨(틸다 스윈튼)의 진행으로 전개된다. <콘크리트 명화(The Concrete Masterpiece)>라고 명명된 이 에피소드에서는, 황당무계한 톤으로 기사를 써내려가는 베렌슨보다도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로젠탈러(베네치오 델 토로)와 시몬(레아 세이두)에 시선이 더 간다. 이 둘은 수감자-교도관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예술가-모델 관계이기도 하다. 또 비공식적인 연인이기도 하다. 얼마전 봤던 <007> 시리즈에서 레아 세이두가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는데, 이 에피소드는 <프렌치 디스패치>의 네 개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만을 담당함에도 불구하고 레아 세이두의 존재감이 충분했다. 베네치오 델 토로의 야성적이면서도 엉뚱한 역할 또한 매우 유쾌하다. (내가 앉은 열에 있던 다른 관객은 내내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심..)
소재가 신선했다. 시몬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콘크리트 벽면을 짓이겨 예술품을 만든다는 것도 신선한데, 그 콘크리트 벽면이라는 것이 교도소의 잿빛 벽이다. 이를 '현대미술'이라는 타이틀을 달아 값을 띄워나가는 스토리도 그럴 듯하다. 반면에 세 번째 에피소드는 그리 낯설지는 않다. 소재 자체는 프랑스의 68 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도 배우들이 쟁쟁해서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청년 제피렐리 역으로 티모시 샬라메가 등장한다. 그리고 기자 크레멘츠 역할을 맡은 이는 프랜시스 맥도먼드. 솔직히 내용을 잘 몰라도 둘의 연기만 봐도 재밌는 것 같다. 60년대의 학생운동이라는 것이 자칫 무겁게 다뤄질 수도 있고 실제로 사회적인 영향도 컸던 사건인데, 그런 사회적인 의미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는 대신 사건 안에서 인물들을 익살스럽고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식도락(gastronomy)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면 예술, 사회운동, 미식 같은 소재들이 '프렌치' 디스패치라는 영화가 다룰 만한 소재로 딱 좋았던 것 같다. 여하간 마지막 에피소드는 인질로 잡힌 아들을 구출하기 위한 경찰서장과 경찰서장의 미식에 대한 집착을 다루고 있다. 이 에피소드를 맡은 로벅 라이트 기자는 대단한 암기능력을 발휘해서 인질구출 작전이 벌어지던 당시의 기억을 서술하는데, 이 인터뷰를 이끌어가는 것이 리에브 슈라이더, 이 역시 반가운 배우다. 뒤이어 경찰과 폭력배들의 게릴라전과 틈틈이 차려나오는 고급진 성찬. 예상치 못한 전개. 모스부호.
"Don't Cry in My Office!"
그로테스크한 무드 속에서도 배우들이 잃지 않는 것은 일종의 낙천성(前向き)이다. 만남을 주선하는 테이블에서 최루탄 냄새에 마스카라 번진 눈물을 훔치는 크레멘츠(프랜시스 맥도먼드), 도시의 천태만상을 자전거를 타고 누비며 기록하는 세즈렉(오웬 윌슨), 이 도시에서 이방인으로 머물며 유일하게 자신에게 따듯했던 것은 한 끼의 식사였다고 읊조리는 로벅(제프리 라이트), 시위의 포탄 속에서 사랑을 찾아나서는 청춘남녀, 긴급상황에서도 다채로운 재료와 기발한 레시피로 근사한 식사를 내어왔던 경찰이자 명품 요리사 네스카피에, 전기의자에 스스로 올라갔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작품활동에 몰입했던 로젠탈러. 이 인물들은 개성 넘치고 또한 꿋꿋하다.
"Just Try To Make It Sound Like You Wrote It That Way On Purpose."
빌 머레이에게 헌사하는 프렌치 디스패치의 마지막 지면을 채우기 위해 엄선된 이 네 개의 에피소드는 이리하여 매듭지어지고 엉뉘 쉬르 블라제의 분주함은 열린 결말로 끝맺는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엉뉘라는 공통분모를 제외하면 전혀 다른 스토리를 다루고 있고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된 영화이기는 하지만, 극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기승전결이 있는 영화다. 달리 말하면 두 번째 에피소드 <콘크리트 명작>, 세 번째 에피소드 <선언문 수정>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두 에피소드는 다른 에피소드들과 달리 로맨스가 가미되어 있어서 풋풋하고 촉촉한 느낌도 있다. 완벽한 풍경과 소품들 덕에 눈이 호강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다.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고나서 한 주 지나서 즈음 유럽유럽한 영화를 또 한 편 보고 싶어서 <나의 끝, 당신의 시작>이라는 작품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원하는 시각 원하는 상영관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어찌저찌 보게 된 영화가 <비거 스플래쉬>인데 大~만족이었다. 엄청난 사건이나 메시지가 있는 영화는 아닌데도 124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푹 빠져서 봤을 만큼 서사가 강한 영화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건 마리안(틸다 스윈튼)-폴(마티아스 쇼에나에츠) 커플이지만, 영화에서 더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해리(랄프 파인즈)-페넬로페(다코타 존슨)이다.
Paul de Smedt: You're obscene.
Harry Hawkes: We're all obscene. Everyone's obscene. That's the whole fucking point. We see it and we love each other anyway.
사실 이 정도 영화면 감독도 먼저 알아보고 볼 만도 한데, 어찌저찌 본 영화다보니 감독이 루카 구아다니노라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작품 때문에 알 법도 한데,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햇살 넘치는 풍광이며 배우들의 능청스런 연기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의 제목 <비거 스플래쉬>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명이기도 한데,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에 묘사된 것보다도 영화속 배경이 더욱(!!) 청량감 넘친다. 오팔 빛깔의 수영장, 헐벗은 민둥산을 군데군데 수놓은 파스텔빛 초록 잎들. 고풍스러운 빌라, 쾌활한 사람들. 카프리 섬을 배경으로 하는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소설 『경멸(il disperezzo)』 못지 않은 등장인물의 심리 교차와 편집이 전개된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젊은 시절 사랑했던 옛 연인들, 지금은 멀어진 관계. 끝모를 중독으로 한때 삶을 포기했던 남자. 그런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고 유혹하는 소녀의 심리. 시로코(사하로부터 불어오는 모래바람)가 들이닥치기 전에 나서는 짧은 산책, 시원하게 물살을 가로지르는 남자들,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관능적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여자들. 이탈리아의 작은 섬, 판텔레리아. 시칠리아 섬보다 옛 카르타고의 땅 튀니지보다 가까운, 그래서 맑은 날에는 아프리카 대륙이 보이는 섬, 낯선 풍광. 유혹, 중독, 도피, 회유, 집착, 욕망, 기억.
영화에서 전개되는 스토리는 단순히 판텔레리아만을 배경으로 하지만은 않는다. 마리안과 해리가 연인이었던 과거 시점이 현재와 계속 교차하면서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를 진전시킨다. 처음부터 이들의 사각관계는 아슬아슬하다. 한때 동료였던 해리와 폴, 정체불명의 소녀 펜(페넬로페). 갑자기 섬으로 들이닥친 해리-펜 부녀와 이들을 바캉스를 보내는 빌라로 받아들인 마리안-해리 커플. 여기에는 출발점에서부터 야릇한 긴장감이 배어 있다. 모두에게 미움받는 남자(해리), 모두의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남자(폴). 공격적인 여자(펜), 목이 쉬었다는 구실로 말을 아끼며 자신을 숨기는 여자(마리안). 판테렐리아의 축제 속으로 합류하는 서로 다른 목적과 본능.
이번 리뷰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배우가 틸다 스윈튼이기는 하지만 <비거 스플래쉬>에서 재발견한 배우는 단연 랄프 파인즈다. 랄프 파인즈라고 하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작품으로도 기억에 남아 있지만,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다. 마치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시네마천국>의 토토처럼, 책을 좋아하던 가냘픈 소년이 한켠에 옛사랑을 안고 세월을 헤쳐나가는 <더 리더>의 마이클 버그, 그 역을 랄프 파인즈가 맡았었다. 랄프 파인즈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피터팬처럼 한나 슈미츠의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어른이 된 역할을 연기한다. 그때의 중후하고 묵직한 연기가 기억에 남는데, <비거 스플래쉬>에서는 과연 푼수(...)에 가까운 능청스러움과 경박함을 연기한다.
그런 그의 연기가 좋았던 건, 겉으로 드러나는 극도의 가벼움 이면에 자신의 욕망을 억지로 꾸미지 않고 (무례할 정도로) 돌진하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모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전체적으로 진중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랄프 파인즈의 연기를 보다보면 어쩐지 그런 삶의 방식을 택한 그 나름의 까닭에 수긍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견원지간처럼 지내는 폴과 해리가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에는 그 단서가 있다. 폴은 말한다, 인간은 역겹다고(obscene). 그리고 해리는 말한다, 맞아, 인간은 죄다 역겨워,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서로 사랑해. 과연 어느 쪽 말에 좀 더 진실이 실려 있을까. 사실 자신의 욕망에 가장 흔들리면서도 끝내 어둠 속에 진실을 묻어 두었던 것은 폴이 아니었을까. 폴의 말은 인간은 역겹다는 데에서 끝나지만, 해리의 말은 역겨워도 결국은 사랑한다는 것으로 끝맺는다.
인생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폴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두 여자로부터 비호(庇護)를 받고, 해리는 황망하게 객사한다. 펜이 마지막에 거칠게 내뱉은 이탈리아어 문장들과 비행기 안에서 흐느끼며 흘렸던 눈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진실은 드러날 듯하다가 어느 정도 가려지고, 각자의 욕망과 목적은 충돌할 듯하다가 어느 정도 교차한 뒤 흩어진다. 판테렐리아의 소란이 가라앉기까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고, 한여름의 서사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오랜 여운을 남길 것이다.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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