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밀도 있는 장면들로 꽉 차 있어서 올 한 해 봤던 영화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캐릭터들의 말과 행동은 아주 잘 절제되어 있고, 그들 사이에 교차하는 대사와 시선은 단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드러내보이길 두려워하는 아카리(あかり), 친구들 사이에서 묵묵하게 관계를 조율하지만 그 자신이 처한 곤경은 털어놓지 못한 사쿠라코(桜子), 허울뿐인 대화 속에서 사실은 자신이 죽임 당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던 준(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데 마냥 서툰 예쁜 이름의 후미(芙美), 자신의 사랑을 관철시키겠다는 코헤이(公平), 의미없는 말들로 사람들을 시험하는 우카이(鵜飼), 코헤이와 다른 형태의 사랑을 정의내렸던 코즈에(こずえ), 그 어느 쪽이든 틀린 말은 없다. 서로의 생각은 다르지만 역설적이게도 서로의 생각을 지지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코즈에의 낭독회와 낭독 워크샵 이후 뒷풀이 장면이다. 코즈에라는 어린 신인 작가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미발표 원고를 읊는 장면, 이어지는 코헤이와의 짧은 대담,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코즈에와 코헤이의 담담한 논박, ‘누가 누구를 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쿠라코와 코즈에의 짧은 언쟁, 이 장면의 밑바닥을 흐르는 타쿠야(拓也)와 후미의 위태로운 갈등 상황.
이 씬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목은 코헤이가 코즈에에게 당신은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것 아니냐며 독자 된 입장에서 비판적 의견을 조곤조곤 전달하는 장면이다. 영화 안에서 코헤이라는 인물(준의 남편)은 준의 친구들로부터 결코 환대받는 인물은 아니다.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채 오로지 논리적인 접근 방식으로 준을 회유하려는 코헤이의 태도는 친구들에겐 이성(理性)을 가장한 새로운 형태의 괴롭힘 같아 보이기 충분하다.
그런데 코헤이의 입장을 수긍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든 게 바로 이 낭독회 뒷풀이 장면에서다. 코헤이는 어떤 식으로든 준과의 사랑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고 여전히 답답한 소리를 한다. 타이밍을 놓친 건 맞지만 여하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다름’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일생에 하나의 커다란 행복이 될 것이다. 대단히 맹목적이다.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다’는 것은 빠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본다’는 것도 빠져 있다. 그야말로 이론상으로 방아쇠를 당겨서 사랑이라는 열차를 다시 움직여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의 대화이며, 그에게는 새로운 타이밍이 필요하다. 여전히 이기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그의 맞은 편에 앉은 코즈에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교해보면 그의 생각을 어떤 식으로 수긍할 것 같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마음 한켠에 담아두는 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터이밍을 흘려보낸다는 것,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위하는 태도일까. 그냥 오며가며 흔들리는 무수히 많은 생각 가운데 하나인 것은 아닐까. 코헤이는 그런 물음표를 던진다.
아쉬움이라고 한다면 이 낭독회 장면 이후인데, 후미, 아카리, 사쿠라코, 준이라는 네 명의 주인공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결국 매우 비슷한 결심으로 수렴해 간다. 모든 이야기와 처지가 입체적으로 다뤄지던 영화에서 서로 닮은꼴로 주인공들이 생각을 정리해가는 모습은 영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인상 깊었던 장면은 중심이란 무엇인가(重心って何だ)라는 주제로 우카이라는 인물이 워크샵을 이끌어 나가는 장면이었다. 다소간 정체가 의심스러운 이 남성은 워크숍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끔 한다. 무게중심을 이쪽 저쪽으로 움직여보다가 무게감이 사라지는 순간 사물은 균형을 잡는다. 관계와 커뮤니케이션도 이와 같다. 이쪽으로 치우치고 저쪽으로 치우치는 듯하다 중간지점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 균형점은 영구적이지 않다. 기묘하게 중심을 찾은 사물도 작은 바람이 스치면 중심을 잃는다.
우카이가 이끄는 워크숍은 아무리 봐도 허술한 구석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듯하다. 관계와 소통이라는 것은 언제나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어딘가 관계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고, 때로는 부당하고 불리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관계를 주도하면서 불안함을 느낄 때 또한 있다. 그러다 가끔씩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발견된다고 우카이는 말하는 듯하다.
이렇게 해서 종반부에 이뤄지는 코즈에의 낭독회 워크숍과 초반부에 묘사되는 우카이의 신체 사용하기 워크숍은 묘한 대칭을 만들어내면서 그 중간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아 낸다. 이 워크숍은 (후미가 몸담고 있기도 한) Porto(이는 ‘나르다’를 가리키는 라틴어로 의도된 단어 같기도 하다)라는 에이전시를 통해서 기획되고 진행된다. 그리고 초반부와 종반부를 길게 할애하는 두 개의 워크숍 사이의 장장 네 시간에 가까운 여백 속에 앞선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그려지는 것이다.
세 번째로 인상 깊었던 장면은 정장 차림의 사쿠라코와 기모노 차림의 시어머니가 햇살 따스한 한적한 길을 걷는 장면이다.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한 시어머니는 며느리인 사쿠라코에게 말한다. 너는 너무 진지한 게(真面目すぎる) 문제라고, 그렇게 진지한 건 어찌보면 오만(傲慢)한 거라고. 시어머니의 말대로 항상 속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그녀의 태도는 어느 순간 그녀 자신을 지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녀의 심경 변화는 영화의 말미에서 잘 드러난다.
<해피 아워>는 일본의 고베(神戸)를 배경으로 한다. 간사이 사투리도 꽤 많이 등장한다. (아카리와 사쿠라코, 준이 많이 쓰고, 후미는 덜 쓰는 편이다.) 지역색이 많이 묻어나는 영화여서 하마구치 류스케의 인물정보를 찾다보니, 감독 본인은 가나가와 현 출신인 모양이다. 어쨌든 영화에는 항상 바다가 등장한다. 아리마(有馬)로 올라가는 전차 안에서 내려다 보이는 고베의 바다, 장바구니를 들고 골목길을 오르는 준의 등 뒤로 보이는 바다, 아카리가 담뱃대를 집어드는 병원의 테라스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바다, 워크샵실의 창문밖을 유심히 내려다보는 우카이의 시선 너머 바라다보이는 바다. 바다들. 수평선을 이으며 파르르 흔들리는 미늘.
그리고 관계를 갈구하면서도, 아니 갈구할 수록 갈증을 느끼는 37살 나이의 어른들. 어른들이지만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삶을 감내하기 어려웠던 어른들의 이야기. 소년이든 청년이든 중년이든 노년이든 바라는 것과 느끼는 것이 사실은 별다를 것이 없었던 이야기. 어쩌다가 가끔씩 끼어드는 행복한 시간들(happy hour)과 거의 대부분의 삶을 채우는 행복하지 않은 순간들. 우리는 외롭지만 웃고 싶다. 히나코(日向子)의 말처럼 알고 보면 존재라는 게 빈 껍데기(空っぽ)인 순간이 있고 빈속을 맹렬히 흔들어 보이고 싶은 순간이 있을지 모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게 행복했던 순간이나 불행했던 순간보다는 행복에 대해서 고민했던 때가 언제였던가 생각하며 긴 꿈에 푹 빠졌다 깬 기분이다. [終] NB. 코즈에의 소설이 실제 있다면 꼭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