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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다나카 키누요(田中絹代)일상/film 2022. 3. 11. 22:33
르 셩포에서 현재 상영중인 작품들은 최근에 개봉된 작품들은 없고 대체로 최소한 몇 십 년 전 쯤에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저녁 시간에 왕가위의 작품들도 상영하고 있지만, <해피투게더> 같은 작품은 이미 봤기 때문에, 다나카 키누요(田中絹代)라고 하는 귀에 익지 않은 일본 감독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처음 본 작품이 <여자들만의 밤>이고 두 번째로 본 작품이 <러브레터>인데 둘 모두 맞닿아 있는 느낌이 든다.
가장 큰 공통점은 매춘을 하는 여성들이 영화의 중심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배우로도 활동했던 다나카 키누요 감독은 48년 미조구치 켄지(溝口健二) 감독의 작품에서 창부 역할을 맡은 적이 있는데, 이후 그녀가 감독하는 작품 안에 창부라는 모티브를 활용하기 시작한다. <여자들만의 밤>과 <러브레터> 모두 외부로부터 갱생을 종용받지만 좀처럼 갱생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는 이들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쩐지 토머스 하디의 소설 『테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여자들만의 밤>에서 주인공 키누코(邦子)는 매춘을 하던 여성들을 갱생하는 감호시설에서 가장 모범적인 존재로 동경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끝끝내 새로운 삶(更生)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마다 그녀에게 씌워진 주홍글씨가 늘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공장에서 두 번째 직장을 구한 키누코가 동료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장면에서는 악(惡)한 인간의 본성이 어디까지 바닥을 드러낼 수있는지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장미 정원에서 일을 하게 된 키누코는 그곳에서 만난 청년과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그녀의 과거로 인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먼 바다로 떠나 해녀 일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여성의 시각에서 비참한 상황에 처한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 흥미롭고, 영화 속 여성들의 갱생을 자처하거나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여자들만의 밤>이 1961년에 개봉한 작품이라면, 다나카 키누요의 데뷔작인 <러브레터>는 1953년에 만들어져서 시대적으로 조금 다른 풍경을 다루고 있다. 일단 감호시설이나 갱생 공간을 주된 무대로 삼던 <여자들만의 밤>과 달리, <러브레터>는 도쿄라는 도시 공간으로 무대를 옮겨 온다. 데뷔작임에도 당해년도에 칸느 영화제에 초청되었다는 점 또한 특기할 만한 점인 것 같다. 레이키치(真弓礼吉)라는 '남성'이 주인공을 맡고 있다는 점은 관계구도라는 측면에서 <여자들만의 밤>과 다르다. <여자들만의 밤>에서 남자는 매우 주변부적인 존재로 등장하며, 악역을 맡는 것 또한 여성들이다.
<러브레터>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전후 일본이 처한 문화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패전한 일본에는 미군을 상대하는 거리의 여성들이 살아간다. 한편 2차 대전 당시 군에 동원되어 복무한 레이키치는 징집이 끝났지만 일을 찾지 못하고, 동생의 집에 얹혀 살면서 이러한 여성들로부터 의뢰받은 연애편지를 대필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러브레터’ 또는 ‘연애편지’는 영화에서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레이키치의 어릴 적 친구이자 레이키치가 열렬히 사랑했던 미츠코(道子)가 쓴 연애편지가 있다. 정혼으로 인해 레이키치와 결혼에 이르지 못하지만 레이키치를 사랑했던 미츠코는 결혼하기 전 그녀의 진심을 알리는 편지를 남긴다.
두 번째 종류의 연애편지는 앞서 말한 것처럼 창부들이 미군의 호감을 사거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대필을 청탁한 연애편지가 있다. 죽마고우인 나오토와 레이키치는 당시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아는 지식인이었음에도, 궁핍한 전후 상황에서 변변한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이들 여성들로부터 의뢰받는 영문 편지를 쓰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이 두 종류의 '연애편지'는 동일한 외양의 띠고 있지만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매우 모순적이다.
사건의 발단은 전쟁으로 인해 남편과 사별한 미츠코가 레이키치와 5년만에 조우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영화 안에 묘사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전쟁으로 인해 똑같이 생계를 걱정하게 된 미츠코 역시 요코하마의 미군캠프에서 일거리를 찾게 된다. 이 때 알게 된 미군 사관과 친분을 쌓고, 이를 계기로 편지 대필을 맡기기 위해 나오토가 대필 작업을 하던 공간을 찾게 된다. 5년만에 만난 옛 연인이지만 레이키치는 다른 남자와 함께 지냈다는 것과 그 상대가 다름아닌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커다란 배신감을 느낀다. 미치코는 창부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레이키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며 괴로워 한다.
영화의 말미에서 병원으로 급히 달리는 택시 안에서 나오토가 레이키치에게 건네는 말은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누가 누구한테 돌을 던질 수 있겠느냐” 먼저 전쟁을 일으키고 패전한 일본이 누구한테 책임을 따질 수 있겠는가. 패전하고 창부들에게 연애편지를 대필하는 자신들이 과연 그들을 찾아오는 여자들을 힐난할 수 있으며, 미치코를 탓할 수 있겠는가. 전후 상황의 아이러니. 그런 질문을 감독은 관객들에게 던진다.
감호시설이나 공장이 주된 배경을 이루는 <여자들만의 밤>과 달리, <러브레터>에는 활기찬 도쿄의 풍경이 가득 담겨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특히 그늘이 크게 드리워진 신사(神社) 입구에서 레이키치와 미치코가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던 장면은 아름다운 흑백화면으로 남겨져 기억에 남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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