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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영화는 북유럽 특유의 창백하고 차분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말끔하게 표백된 영상 안에서 우울한 군상들의 삽화(vignette)가 하나의 커다란 스케치를 만들어 나간다. 신앙심을 잃은 사제, 옛 친구에게 미운털이 박힌 한 남자, 패전하고 쫓겨나는 군인들과 폐허가 된 도시,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 여자로 인해 앙심을 품은 남자..
영화는 루틴같은 비애와 고통이 우리의 삶을 끝없이(endlessly) 수놓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영화 속 장면장면들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지루한 느낌도 있다. 영화에 결여된 것은 단연코 웃음이다. 영화에는 웃는 얼굴을 찾아볼 수 없다. 『장미의 이름』에서 엄격히 웃음을 금했던 호르헤 수도사의 철학이 떠오른다.
남자의 품에 안겨 하늘을 부유하는 여인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샤갈의 그림 같은 영화 장면에는 허물어진 건물들의 잿빛 잔해가 깔려 있다. 하지만 여자를 품에 안은 남자는 허공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결국 이 끝없는 삶은 외면과 응시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지도 모른다. [slut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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