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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炎)과 술(酒)일상/film 2021. 12. 4. 21:08
<티탄>은 21년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작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칸 영화제가 개최되지 않았고, 재작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게 마지막이다보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법도 하다. 이번 쥘리아 뒤쿠르노의 황금종려상 수상이 또 하나 의미 있는 점은 여성 감독으로서는 28년만에 이루어진 수상이라는 점이다. <티탄>의 이번 수상이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점이 없지 않지만(사실 이변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흔하다), 꼭 이번 수상이 아니더라도 뒤쿠르노의 첫 장편 작품을 이전에 봤던지라 감독의 독창성을 그다지 의심하지는 않았다.
<티탄>이 뒤쿠르노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그녀의 첫 장편 작품은 '16년도 발표된 <로우>다. 때문에 갓 두 번째 작품을 만들어낸 쥘리아 뒤쿠르노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은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는데, 사실 이번 <티탄>이라는 작품에서 비단 감독의 경륜이나 성별만이 화제가 되었던 건 아니다. 아마도 가장 파격적이었던 건 쥘리아 뒤쿠르노의 작품 자체가 아니었을까 싶다. 기괴스럽고 엽기적이고 끔찍하고 역겹기까지도 한 장면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그녀의 작품을 그녀 자신도 수상소감에서 밝히길 이러한 '괴물'을 받아줘서 고맙다(Merci au Jury de laisser entrer les monstres)고 했다. (바로 전 수상작인 <기생충>과는 매우 분위기가 다르다. 사실 모든 작품과의 접점을 일체 거부하는 작품인 것 같기도..)사실 나는 영화에 대한 선입견(?) 같은 걸 걷어내려고 영화를 보기 전에는 굳이 여러 정보를 찾아보지 않는다. (특히 리뷰는 의식적으로 찾지 않는다) 그래도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는 필요하기에 idmb의 평점과 포스터에 드러나는 이미지와 텍스트, 그리고 상영관 정보를 참고하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쿠르노의 작품은 <로우>가 국내에 개봉했을 때 바로 봤었어서 <티탄>이 개봉한다고 했을 때 미리부터 기대감이 있었다. 그만큼 <로우(프랑스어 원제: Grave)>를 인상깊게 봤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로우>라는 작품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은 그녀가 영화에 선보이는 생소한 소재와 인물들, 그리고 호소력 강한 장면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로우>를 볼 당시에도 피에 미쳐날뛰는 주인공이나 신체를 아주 기괴하게 비틀고 절단해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뒤쿠르노의 작품이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티탄>은 <로우>에서 보여주었던 수위를 한참 넘어서 버렸다. 단순한 폭력, 잔혹함의 문제가 아니다. 가학적인 면에서 보면 살인마를 소재로 하는 비슷한 수위의 작품들도 여럿 있다. 그런데 <티탄>은 뭐라고 묘사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사람으로서는 순수히 공포스러움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측면이 있다. 영화 초반부의 10~20분 정도가 심리적 마지노선을 건드리는 고비(?)인데, 영화가 시작한지 채 20분이 되지도 않아 내가 앉은 자리 앞으로만 두어 명이 짐싸들고 상영관을 아예 나가버리는 작품은 생전 처음 본다=_= 나 역시 쉬지 않고 몰아치는 장면장면들 때문에 이걸 과연 잘 볼 수 있겠나 싶었는데,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어떤 생각으로 관람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일단 영화의 그로테스크함에 압도당해서 마치 끌려가듯 스토리를 여차저차 따라가기는 하는데, 문득 그래서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애당초 가당치도 않는 설정(살인자와 그 피살자의 부모가 한 지붕 아래서 살아간다)이 뭔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별별 해석을 덧붙여 본다. 이 작품은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케루비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건가? 영화 속 주인공인 알렉시아(또는 아드리앙)는 대단히 양성적(兩性的)이고 변덕스럽고 상대를 가리지 않는 인물이다. '케루비노'를 오마주하며 스토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본 게 아닐까? 그게 아니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영감을 받은 건가? 도대체 알렉시아가 뱃속에 잉태한 아기는 무엇일까? 등등등.
아무튼 여러 방식을 동원해 신체를 짓뭉개니까 계속 보면서도 좀 질릴 것 같은 작품이었는데(알렉시아가 아드리앙을 흉내내기 위해 눈썹을 열심히 미는 장면에서는 너무 황당해서 실소했다..;;),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뭔가 묘하게 와닿는 게 있었다. 사실 르그랑(뱅상 랑동)이라고 해서 정말 알렉시아의 정체를 몰랐을리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오로지 아들의 부재가 남긴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이 모든 사건 발단의 원흉인 알렉시아를 맞아들인다. 화학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결합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인물의 공생을 도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뒤이어 알렉시아의 뱃속에서 마침내 나온 정체불명의 생명체...(이건 스릴런가 SF인가...)아주 간단한 해석(그리고 가능한 해석)은 결국 <티탄>이라는 작품이 분열된 오늘날의 사회상을 어쩌면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세상은 갈수록 종파적으로 되어 간다. 모든 이슈에 '믿음'이 뿌리내리고 일체의 논리를 거부한 채 상대와 거칠게 날을 세운다. 영화에 나오는 두 축의 인물(알렉시아와 르그랑)은 모두 대단히 병적인 상태에 있는 인물들이다. 비린내 날 것 같은 싱싱한 쇳덩이들과 거대한 화염(火焰)은 이들이 처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차갑고 피 한 방울 흘릴 것 같지 않은, 그러나 뜨겁고 모든 게 터져 흘러내릴 것 같은.
결국 이들은 극적으로 화해한다. (또는 화해에 성공했다고 이해하고 싶다.) 이 둘 사이에는 제3의 생물체가 가로놓여 있다. 가쁘게 헐떡이는 갓난아기의 축축한 등짝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정말 열린 결말로 계속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Hvad er ungdom? En drøm. Hvad er kærlighed? Drømmens indhold.”
젊음이란 무엇인가?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At vove er at tabe fodfæste en kort stund. Ikke at vove er at tabe sig selv”
해본다는 것은 잠시 발판을 잃는 것이다. 해보지 않는 것은 자신을 잃는 것이다.
이런저런 합리화를 해가면서 두 번째 영화를 관람한다. 사실 <어나더 라운드>는 <티탄>보다 먼저 보려고 점쳐둔 영화다. 왜냐하면 국내 개봉일이 내년으로 넘어간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올해가 지나고 내년도 늦겨울이 되면 이런저런 일들로 영화관을 찾아가서 영화를 보는 일은 자연스레 줄을 것이다.
베를린 영화제가 2월, 칸 영화제가 5월, 베니스 영화제가 9월, 부산국제영화제가 10월, 다시 아카데미 영화제가 3월에 있으니까 볼 만한 영화는 연중 꾸준히 많아야 할 것 같은데, 경험적으로는 연말연시에 볼 만한 영화가 대체로 몰려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볼 만하다'는 건 평소에는 접하기 어려운 영화들을 말한다. 예술영화-대중영화라는 구분이 실익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나누자면 예술영화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해외에서 한 차례 인정받은 작품들이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부산국제영화제가 끝나고 연말 즈음부터 극장가에 유통되기 시작하는 건가 하고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시선을 잡아끄는 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건 관객 입장에서는 물론 반가운 일이지만, 한정된 기간 안에 뭘 볼까 고르는 건 참 고민스런 일이다+_+;;
이 영화의 덴마크어 원제는 'Druk'으로 말 그대로 '술(酒)'이라는 뜻이고, 그렇다면 영어 원제에서 가져온 '어나더 라운드'라는 표현은 연거푸 술을 들이마신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 북유럽 사람들이 술을 엄청 많이 마신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영화에 나오는 덴마크인들의 음주문화는 실로 엄청나다. 영화에서는 어린 나이부터 술을 자연스럽게 접하는 학생들을 볼 수 있고, 이들의 주정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어른들이 나온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혈중 알콜농도가 0.05% 부족하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가설을 검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혈중알콜농도와 관련해서 도합 세 가지 가설을 검정하는 것만으로도 코미디적인 요소가 충분한데, 후반부로 가면서는 비극적인 서사가 겹치면서 좀 더 깊이 있게 등장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또 중간중간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표현이 나와서 생각을 한 번씩 해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유급을 당한 이후로 대학 진학 때문에 고민하는 세바스티안이라는 소년은 졸업시험의 철학 문항에서 키에르케고르를 인용한다. "Q: 불안이라 함은 무엇이지?" "A: 불안은 인간이 실패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관한 개념이죠. .....인간은 자신이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타인과 삶을 사랑할 수 있어요" 멋진 표현이다.
기발한 가설을 하나둘 검정해 나가며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고 낙천성을 되찾아가던 4인의 중년 남성들도, 그들의 삶에 오랫동안 들러붙어 있던 비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다. 희극적 요소로 가득했던 영화의 무게중심은 후반부를 향해 갈수록 비극으로 점점 기울어져 간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세상은 그 빈틈을 비집고 존재를 괴롭힌다. 누군가는 이를 슬기롭게 헤쳐나가고 누군가는 이를 버티지 못한다. 북유럽의 기나긴 겨울밤과 척박한 풍경은 이처럼 나약한 존재가 마주한 황량한 비극을 잘 보여준다. 적당한 술은 괴로움을 망각하게도 도와주고, 긴 밤을 무던히 흘려보낼 수 있게 도와준다. 하지만 때로 술은 나를 바닥에 더 가깝게 만들고, 가벼운 슬픔에도 푹 젖어들게 만든다.
처음에는 마르틴(마스 미켈센)의 우울감을 달래주고 자신감을 북돋기 위해 합심한 사총사는 다시 저마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삶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괴로움과 고독의 무게는 저마다 달라도 졸업의 시기는 마침내 다가왔다. 이들의 치기어린 가설 검정도 마침내 끝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삶은 그러한 가설(hypothesis)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하나하나의 삶이 독립적인 표본이고, 실험한들 일반화할 수도 없다. 삶이라는 모집단에서는 평균이라든가 표준편차, 신뢰구간을 적용할 수가 없다. 하나의 삶은 그 자체로 완결된 그 무언가이기에.
두 편 모두 좋았고 비교될 만한 작품이었다. 인물간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춘 <티탄>과 달리 <어나더 라운드>는 조금 더 자기성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티탄>의 서사는 가히 폭발적이었다면 <어나더 라운드>의 서사는 술이라는 소재를 빌리고 있을지언정 조용하고 청아하다. <아나더 라운드>를 보다보면 이름 모를 친구가 그리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키에르케고르의 글을 찾아 읽고 싶어지기도 한다. 아드레날린과 세로토닌을 넘나드는 두 이야기. 분노의 척력과 우애의 인력. 이렇게 벌써 마지막 달의 늦은 밤이다. [E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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