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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머리 꼭지까지 차오른 스트레스를 해소할 겸 영화관에 갔다. 한동안 심야시간대에 영화를 상영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 근래에는 꽤 늦은 시각까지 상영하는 영화가 있었다. 기분이 기분인 만큼 정적인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았고, 액션이 가득한 영화 중에 <듄> 아니면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보고 싶었다. <007> 시리즈는 개봉을 한지가 좀 되었는지 가까운 곳에 상영관이 없었고, <듄>은 상영하는 곳이 많아서 부랴부랴 가까운 영화관에 갔다.
영화를 보기 며칠 전 강남역 일대에서 <듄>을 크게 홍보하는 광고판을 보며 그냥 지나쳤었는데, 영화를 보기 전까지 딱히 기대도 없었지만 막상 보니 재미있었다. (사실 내게 재미없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_=) 아무래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영화의 소재다. 영화는 사막을 무대로 하고 있고 꽤나 종교적인 서사를 담고 있다. (원작이 있는 영화다.) 그리고 레토가 아카리스에 당도했을 때 원주민인 프레멘들이 '리산 알 가입(외계의 목소리)'라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굉장히 아랍적인 색채가 묻어나는 영화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사회구성이 동질적인 곳에서 무슬림들의 근본주의가 매우 위협적으로 보이고 정서상 쉽게 친근감을 느끼기 어렵기도 하지만, 거꾸로 얘기하면 그만큼 소재가 독특하고 이색적이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톨킨이 여러 고대 언어들을 조합해서 신묘한 분위기를 부여했듯이, <듄>에 등장하는 중동의 언어 또한 신비스럽고 영적인 느낌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메시아(영화에서는 폴)의 강림이라는 서사 측면에서 여전히 서구적인 세계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기술이 최첨단으로 발달한 수만 년 뒤에도, 종교라는 우산 아래 집단적인 살상이 이뤄진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폴은 일종의 메시아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해나가겠지만, 그 과정에서는 수많은 목숨이 제물로 바쳐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것을 보면 기술이 어느 수준에 이르든지 피아를 구별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 속성은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도 도구를 써서 자기와 닮은 존재를 맹목적으로 죽이거나 하지 않는다. 때문에 영화에서 대결을 펼치는 아트레이데스 가문이든 하코넨 가문이든 고귀한 모습으로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야만성의 비릿한 냄새가 코끝까지 전달되는 듯하다.
한 주 정도 간격을 두고 결국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보았는데, <듄>과는 반대로 기대 이하였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듄>과 마찬가지로 기분전환 겸 보려던 것도 있고, 모처럼 레아 세이두가 나오는 작품을 보려던 것도 있었다. (레아 세이두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근래에 2년 정도 작품활동이 뜸했던 건가?! 싶다) 풀기 어려운 난제를 하나씩 돌파해 나간다는 점에서는 <듄>과 서사구조가 매우 닮은 영화인데도, <듄>만큼 몰입하지 못했던 것은 똑같이 소재 때문이었다. 영화의 첫 장면에 어린 마들렌의 집에 침입하는 괴한의 얼굴에 일본식 가면이 쓰여져 있는 걸 보고 어쩐지 기시감이 들면서 벌써부터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본 전통극 노(能)에서 쓸 법한 가면은 이미 다른 여러 작품들에서도 소재로 차용된 바 있다.
감독이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영향이 컸을까, 아니면 일본 소비자들을 의식한 것일까, 제임스 본드의 최종 행선지가 일본의 하고 많은 곳 중 북방 영토라는 것 역시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분쟁지역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고 있는 지역을 온통 일본풍으로 꾸며 놓았다. 돌과 하얀 모래로 된 일본식 정원, 다다미, 사핀이 입은 일본식 복장까지. 차라리 본드와 마들렌이 바캉스를 보낸 이탈리아의 소도시 마테라 지역이나 본드와 팔로마가 첩보작전을 펼친 쿠바의 광경은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반면, 본드와 사핀이 조우하는 후반부에서 둘 모두 마주보고 정좌(正坐)하는 장면은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을 어색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다니엘 크레이그는 여섯 번째 본드 역을 끝으로 <007> 시리즈에서 하차한다고 한다. 비교적 최근 <나이브스 아웃>도 그렇고 다니엘 크레이그만의 무게감 있고 예리한 눈빛의 연기가 좋았었다. <007> 시리즈가 고전인 만큼 나름대로의 클리셰가 있겠지만, 후속작을 통해 기존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도 계속해서 창의적인 소재를 발굴했으면 좋겠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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