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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햅번과 마릴린 먼로일상/film 2022. 3. 30. 01:45
최근 필모테크 뒤 캬흐티에 라탕(filmothèque du quartier latin)에서 두 편의 영화를 봤다. 한 편은 코엔 형제의 <위대한 레보스키>, 다른 한 편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펀치 드렁크 러브>다. 영화관에는 크게 두 개의 상영관이 있는데 <위대한 레보스키>는 오드리 햅번 관에서, <펀치 드렁크 러브>는 마릴린 먼로 관에서 관람했다. 오드리 햅번 관은 파랑으로, 마릴린 먼로 관은 빨강 컨셉으로 꾸며 놓아서 특색 있는 영화관이다. <위대한 레보스키>를 먼저 보았는데, <펀치 드렁크 러브> 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예정된 시각보다 10분여 늦게 시작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이라면 필립 시모어 호프만이 출연한다는 점 정도다.
나는 코엔 형제의 작품에 담긴 유머 코드나 그들이 보여주려는 세계를 잘 이해하지는 못하는 편이라서 코엔 형제의 작품을 찾아보지는 않는데, 하루는 가장 늦은 시각에 상영하는 작품 중 <위대한 레보스키>를 관람하게 되었다. 코엔 형제의 작품 가운데에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번 애프터 리딩>(개인적으로 가장 난해했던 작품), <인사이드 르윈>, <헤일, 시저!> 정도로, 영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다보니 영화 자체의 스토리보다는 출연 배우—하비에르 바르뎀, 브래드 피트, 오스카 아이작, 조지 클루니 등등—이 먼저 떠오른다.
그럼에도 <위대한 레보스키>는 어렵지 않게 코엔 형제의 유머를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일단 한 녀석(dude)의 집에 강도가 들이닥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는 출발한다. 자신의 이름(본명 제프리 레보스키)과 같은 이름을 가진 부자(빅 레보스키)로 인해 곤혹을 치른 사실을 알게 된 두드는 다짜고짜 변상을 요구하며 빅 레보스키를 찾는다. 여기서 묘사되는 두드와 그의 친구들은 이 이상 소시민적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볼링 게임 한 판에 목숨을 걸고 화이트 러시안을 만들어 마시며 살아가는 인물들로, 이들이 극중에서 휘말려들게 되는 사건 속에서도 엉뚱함과 느긋함을 잃지 않는다.
특히나 제프리 레보스키 역을 맡은 제프 브리지스와 월터 역을 맡은 존 굿맨의 연기가 발군이다. 백수에다 한량인 제프리와 베트남전 참전 이후 공격성을 주체하지 못하게 된 월터. 이들 환상의 콤비는 동명이인인 빅 레보스키가 납치된 아내를 찾아오라는 청탁에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결국에는 빅 레보스키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지 않는다. 이 콤비의 대화는 전혀 다듬어진 구석이 없고, 앞뒤가 맞지 않을 정도로 합리적 판단에서 벗어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소소한 욕심이라든가 야망 따위 지니고 살아가지 않는 평범한 인물들이지만 크고 작은 상황들을 통쾌하게 헤쳐나가고 이 정도면 슬기롭다고 해도 좋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자연스럽게 액자형 구성을 취하고 있는 영화의 형식 또한 기억에 남는다. 먼저 영화 도입부에는 제프 레보스키를 ‘녀석(dude)’이라 소개하는 이름 모를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 볼링장에서 두드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과 대화를 나누면서 영화는 크레딧을 올린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텍사스 카우보이 풍으로 콧수염을 기르고 흰 모자를 눌러쓴 중년 남성으로 영화의 처음과 끝에 잠깐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시그니처를 남기면서 코믹한 영화 자체를 한 차원 멋스럽게 만든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98년도에 개봉한 <위대한 레보스키>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작품이다. 영화가 개봉한 게 2002년인데, 20년 전에도 이런 감성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지금 봐도 근사한 작품이다. 영화의 특정 지점들을 콕콕 집어낼 방법은 없지만 (사실 너무 많아서 골라내기도 어렵지만) 개성 가득하고—그렇지만 과하지 않고—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이전에 좀처럼 본 적이 없는 스타일의 로맨스 영화다.
영화는 전화기를 든 배리(애덤 샌들러)가 작업장 또는 사무실의 어두컴컴한 한구석에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보이는 업무를 신중하게 응대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전화를 마친 배리는 불현듯 공포에 질린 듯 텀블러를 손에 꼭 쥔 채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꽂히는 작업장 밖으로 빼꼼히 나선다. 이윽고 바로 옆 차로로 달리던 차량이 전복하고 정체 모를 흰색 차량이 인적 없는 차도 위에 풍금(harmonium)을 턱 내려놓는다. 뒤이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역시나 아직까지는 이름 모를 여자(리나)가 차를 작업장에 맡겨두고 유유히 사라진다. 한참을 주저하던 배리는 길거리에 덩그러니놓인 풍금을 들고 걸음아 나 살려라 젖먹던 힘을 다해 사무실로 달음박질치듯 돌아온다.
여기서 아무 의미도 없이 나타나는 풍금이라는 소재와 그 어휘의 뜻(harmonium)이 <펀치 드렁크 러브>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집약적으로 묘사한다고 생각한다. 즉 이 영화는 내면에 상처가 가득하고 고통을 다스리지 못하는 배리는 자신의 껍질을 깨고 점점 바깥 세상과 조응(hamonize)해 나가는 이야기다. 물론 배리의 마음속 빗장을 여는 열쇠는 리나라는 인물이고, 그녀는 풍금과 동시에 출현한다. 배리가 고민에 빠질 때마다 골똘히 풍금 건반을 눌러보는 장면도 아지자기한 면이 있다.
이후에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기발한 발상은 영화를 가득 메운다. 때때로 사람이 말 못하고 마음 속에 끌어안고 있는 어두운 면이라는 것은 꼭 엄청난 외부 충격이나 개인적 결함에서 기인하지만은 않는다. 멀쩡히 살아가다가 내면을 들여다보니 속이 곪아 있다거나, 아주 사소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내면적 아픔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도 하는 식이다. 배리가 바로 그러한 경우다. 배리는 여행 마일리지를 쌓기 위해 한 대형마트에서 프로모션 중인 상품을 쓸어담으면서도, 사실 그 프로모션이란 게 마트의 계산 실수가 있었다는 점을 인지하고 리나에게 조심스레 털어놓을 정도로 소심하고 무언가에 전전긍긍하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배리의 주변인물들은 끊임없이 그의 내면을 두드린다. 반복적으로 외치는 질문. “이 통조림들은 도대체 뭐야?”, “왜 그런 복장을 하고 있는 거야?” 별 의미 없는 질문 속에서 배리는 자신을 잃은 자신의 삶 안에서 점점 답을 찾아나간다. 리나에게 조금씩 다가가는 과정 역시 이와 같은 더딘 궤적 위에서 이뤄진다. 어떤 면에서는 병적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리게 하는 서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폴 토마스 앤드슨의 작품은 그보다 실험적이고, 그러한 영화적 실험들을 잘 끼워맞춰서 좀 더 감각적이다.
이 영화는 ‘사랑스럽다’는 형용사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배리가 리나를 찾아 떠나는 하와이, 그곳의 와이키키 해변도 퍽 아름답지만, 언뜻 보아 평범함으로 가득찬 이들의 관계 아래에 잠들어 있던 커다란 의미를 탐구하고 일깨워 나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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