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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지지 않는 것들일상/film 2021. 1. 23. 21:21
물의 요정, 운디네. 운디네는 원래 물을 관장하는 정령으로 중세 연금술에서 유래한 신화적 존재를 뜻한다. 그래서 운디네를 모티브로 하는 영화도 이미 여럿 만들어진 바 있다. 이 영화에서도 ‘물’은 핵심을 차지하는 소재다. 저수지와 잠수, 수조(水槽), 야외 수영장까지 모두 물과 관련되어 있다. 조금 더 과장을 보태자면,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도시까지도 물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영화의 배경은 베를린(Berlin). 역사학자인 여주인공 운디네가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한 도슨트에서 설명하듯, 베를린은 고대 슬라브어 ‘베를berl’ 또는 ‘비를birl’에서 왔다. 이 슬라브어는 ‘습지’를 말한다. 얼마전 읽었던 「강철 왕국 프로이센」에도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책에 따르면 브란덴브루크 가의 본거지였던 베를린은 메마른 습지 위에 세워졌던 매우 척박하고 열악한 공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열악한 땅 위에 지금 독일의 토대가 세워졌다는 것이 대단히 흥미로웠다. 영화 <운디네>는 이러한 소재들과 장소들을 엮어가며 이야기의 얼개를 짜 나간다.
잠수사 피규어로 꾸며진 수조 뒤로 ‘운디네’라는 이름이 공허하게 메아리 치는 장면은 조금 실험적이라고도 보이지만 현대적인 감성이 담긴 장면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모양과 역사에 대한 내러티브가 상세히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프로이센 통치하에서 19세기 말에 이루어졌던 공공시설의 확충, 냉전시기 동베를린을 질식할 만큼 가득 메웠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 베를린을 재건하기 위해 설계됐던 야심찬 도시 계획,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되었던 베를린궁 터에 새로이 들어선 미술관까지. 베를린이라는 공간과 시간을 가득 채운 흥망성쇠의 이야기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와도 잘 맞닿아 있다. 이별과 만남, 상실과 치유, 다시 마주한 상실과 반작용.
베를린에 관한 이야기에는 훔볼트 포럼—베를린 한복판에 위치해 있으면서 예술과 학술, 공연이 이루어지는 복합공간이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도 있다. 베를린궁의 폐허 위에 어떠한 상징을 들여야 할지 고심하던 시의 위정자들은 마침내 훔볼트 포럼이라는 착상에 이른다. 바로크 양식이라는 외양을 차용했지만, 그 알맹이는 브란덴브루크 왕조와 다소 거리가 있다. 그 안에는 미술관이라는 내용물로 채워지되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라는 포장지를 둘러쌌다. 주인공 운디네는 베를린궁과 훔볼트 포럼의 연혁을 언급하면서, 이를 ‘절묘한 술수’라고 콕 집어 말한다. 찢어졌다가 봉합된 베를린은 오래된 부대에 새로운 술을 담으며, 불완전하게나마 도시의 새로운 청사진을 그려 왔다.
영화 안에 그려지는 관계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별을 통보 받은 여자는 새로운 사랑에 빠지고, 잘 굴러갈 수 있는 사랑인 줄 알았지만 뜻하지 않게 삐걱임이 생긴다. 그렇다면 새로운 연인과의 위기를 옛 연인에 대한 복수로 매듭지을 수 있는 것일까? 관계를 차곡차곡 채워나가던 사건들은, 뜻하지 않게 새어버리고 방향마저 틀어버린다. 그런 시행착오 속에서도 영화 속 인물들—그리고 우리들은—주저함 없이 다른 만남으로 관계를 채워나가고, 설령 그것이 꽉찬 상태가 아닐지언정 관계의 끈을 놓지 않는다. 운디네와 크리스토프가 서로를 응시하던 집요한 눈빛은 갈구하지만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관계에 대한 허기를 의미하는 것 같으면서, 허기가 해소되지 않을지라도 끈질기게 관계로 한걸음씩 다가가겠다는 의지를 단호히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낱 물거품이 될까 절망하면서도 왕자에 대한 사랑을 거둘 수 없었던 <인어공주>를 재해석한 톡톡 튀는 영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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