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편의 미카엘 하네케일상/film 2021. 1. 17. 10:25
이전까지 보았던 미카엘 하네케의 작품으로는 <하얀 리본>과 <피아니스트>, <해피엔딩>이 있다. 보통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하얀 리본(2009)>은 본지가 워낙 오래되어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그보다 8년 더 된 <피아니스트(2001)>는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게 이자벨 위페르와 브누아 마지멜 주연의 <피아니스트>다. 사랑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광기라 해야 할지, 사랑의 광적인 측면을 적나라하게 들추는 이 영화를 보며 크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한편 최근 작품이라 할 수 있는 <해피엔드(2019)>는 어느 부르주아 가족의 위선을 그린 작품으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따로 움직이는 듯 묘하게 맞물려 있어 구성이 독특한 영화다.
이번에 본 미카엘 하네케의 작품 두 편은 <아무르(2012)>와 <미지의 코드(2000)>다. <아무르>는 종종 재개봉하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는데, 영화관에 발걸음을 하기가 어려운 요즈음 렌탈로 집에서 영화를 감상했다. 주제 면에서 ‘사랑’을 다루기 때문에 <피아니스트>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제뿐 아니라 무겁고 어쩐지 숨막히기까지 한 분위기도 <피아니스트>와 닮아 있다. 한편 <미지의 코드>는 미카엘 하네케의 실험적인 기법과 주제 접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이 분별없이—하지만 동시에 정교하게—교차된다는 것이 <해피엔드>와 느낌이 비슷하다. 번외로 신기한 점은, 이번에 본 두 편의 영화에서 여주인공의 이름은 모두 ‘안느’이고 남자주인공의 이름은 ‘조르주’라는 것이다.
<아무르>의 경우 영화관에서 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기대가 컸던 작품인데, 막상 딱! 강렬한 느낌이 오지 않았다. 정말로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보는 것에서 오는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도둑맞은 인생, 도둑맞은 사랑은 누구라도 견딜 수 없는 것인가’하는 물음이었다. 조르주의 입장에서는 갈수록 노쇠해 가는 안느를 지켜보며 시간을 도둑 맞는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내 안느는 나이에 따른 거스를 수 없는 몸의 반응으로, 오른쪽이 반신불구가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남편 조르주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남편에게 사소한 것들을 부탁할 때마다 위엄을 잃지 않지만, 오히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자존감을 지켜내려는 노력이 보인다. 하지만 차라리 죽음을 앞당기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까지 가려지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조르주가 집안으로 날아든 비둘기를 옷가지를 덮어 잡는 장면이다. 실내에 갇히긴 했지만 원래는 거리를 누볐을 비둘기라는 게 잡히기 어려울 것만 같은데, 엉거주춤한 조르주의 노력으로 몇 번의 시도 끝에 비둘기가 사로잡힌다.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이 짤막한 장면에서 어쩐지 ‘무언가를 내려놓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잡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바로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또 다른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말은 명확하게 그려지지도 않지만 결말이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국 조르주는 어떠한 식으로든 선택이 필요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역시 노년의 끝자락에 접어든 그에게 얼마만큼의 여생이 남아 있는지는 몰라도 선택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떠나 그의 입장에 서서 그 좁은 공간을 바라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믿고 보는 줄리엣 비노쉬가 등장해서이기도 하지만, 보면 볼 수록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테마는 ‘소통’ 또는 ‘의미전달’로 프랑스 영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다. 말의 덧없음, 공감의 부재, 연대의 결핍, 편협한 마음, 엇나가는 대화. 결국 이런 것들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개념들이고, 그나마 화면 속 인물들의 동작과 행위, 발화를 통해서 어렴풋하게 가늠해볼 수 있는 것들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는 농아들이 퀴즈 게임을 하는데, 앞에서 퀴즈를 내는 꼬마의 제스처를 보고 퀴즈를 맞춰야 하는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답을 수화동작으로 만들어 보인다. 이 대목에서부터 ‘마음에 투사(投射)되는 말과 표정 그리고 행위’가 영화의 주된 이야기가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개같은 사랑(Amores Perros)>가 묘하게 중첩되는 영화다. 왜냐하면 이 스페인 영화에서도 전혀 연결고리가 없어보이는 몇 개의 에피소드들이 제각각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점점 하나의 교차로로 수렴해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개같은 사랑>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치정과 살인청부라는 살벌한 이야기를 그린다.) 천한 자, 고상한 자, 비열한 자, 선량한 자 모두 각자의 리듬 속에서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 동일한 지점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가 아무리 떠들고 외쳐도 결국 좁힐 수 없는 마지막 간극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무엇하러 그토록 떠들고 외치며 애를 쓰는가? 이 질문에 대해, 서로의 소통과 교감이 그렇게 어렵대도 결국 우리는 언젠가 어느 한 점에서 만나, 우리 인간은 그런 복잡해서 원형을 규명할 수조차 없는 거미줄 안에서 다른 호흡으로 살아갈 뿐이야, 하고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와 미카엘 하네케는 말하는 것 같다.
영화가 굉장히 다국적적이다. 아프리카—아마 프랑스어권인 서아프리카 지역일 것 같다—와 동유럽의 코소보, 파리의 도회적인 풍경과 시골의 목가적인 풍경까지 모자이크처럼 뒤섞여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종군사진가인 남자주인공 조르주가 지하철에서 도촬한 모노크롬 인물사진을 쭉 나열하면서 전쟁터에서 목격했던 풍경을 무뚝뚝하게 굵은 목소리로 읊는 대목이다. 화면 속 흑백 이미지와 전혀 무관한 내레이션을 오버랩되면서, 우리가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 그리고 머릿속으로 처리하는 정보가 완전히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프랑스에서 강제추방 당한 노숙하던 여인이 고향인 코소보의 마을로 돌아가서 스스럼없이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언젠가 파리에서 밑바닥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며 흐느끼지만, 그녀는 결국 파리로 가기 위해 다시 불법적인 월경(越境)을 택한다. 위선과 연기(演技), 겉치레, 빈말, 계획하지 않은 포즈, 척, 시선, 말투, 시뮬라크르의 성대한 향연.
<아무르>와 마찬가지로 <미지의 코드> 또한 결말이 닫혀 있는 열려 있든 행복하든 슬프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가 ‘미지의 코드’를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고 또는 누군가와 단절되기도 하며 사회 속의 무수히 많은 선분들 속에서 하나의 접점과 교집합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깨달으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fin]
'일상 >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편의 폴 토마스 앤더슨 (0) 2021.03.01 채워지지 않는 것들 (0) 2021.01.23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0) 2020.12.28 두 편의 짐 캐리 (0) 2020.12.23 어떤 개인주의자 (0) 202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