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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가 자꾸 어떤 책 속 이미지를 연상시켰는데, 어떤 책인지 기억나지 않아 영화를 본 후에 찾아보니 마찬가지로 나폴리를 중심축으로 이야기를 그리는 말라파르테의 <망가진 세계>가 찾고 있던 책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영화는 영국작가 잭 런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영국소설이 원작이므로 원래의 배경인 오클랜드가 나폴리로 각색되었고—그렇지만 둘 모두 바다에 인접하다는 면에서는 공통적이다—그런 까닭에서인지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나 영국 경제학자들의 시장과 자본 논리에 대한 언급도 비중 있게 등장한다. 아무튼 영화를 보며 이탈리아 소설 <망가진 소설>이 떠올랐던 것은, 주인공 마틴 에덴이 처해 있었던 빈곤하고 열악한 환경이 <망가진 세계>에 그려진 전쟁 속 참화와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작소설이 1909년도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마틴 에덴> 시대적 배경은 양차 대전 이전에 이념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영화에는 남유럽 특유의 앤틱한 느낌이 있는데, 스페인 영화의 메마르면서도 원색적인 느낌과는 다르다. 코믹하면서도 엄숙하고 비장하고 때로는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스페인 영화와 달리, 이탈리아 영화에는 퇴폐적인 분위기와 소박한 정서, 고집스러운 열정이 엿보인다. 실제로 영화 속 풍경들이 20세기 초반의 풍경의 느낌이 물씬 나게끔 감독과 연출진이 고증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상류계층의 우아한 저택과 이곳에 딸린 정원, 목가적인 근교의 풍경, 낡은 주택가와 골목뿐만 아니라 영화의 중간중간을 환기하는 아주 짤막한 이미지들—익명을 띤 군상의 모습과 구체적인 개인의 모습(어떤 것들은 컬러풀하게 담고 어떤 것들은 흑백안에 칙칙하게 담는다)—이 생생한 분위기를 더한다.
영화에 묘사되는 인물관계는 두 개의 축을 따라 크게 네 개의 사분면으로 나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야만 세계와 문명 세계로, 11살부터 선원 일을 해오던 마틴 에덴이 교육받은 상류층 자제(엘레나)와 사랑에 빠지면서 활자가 쌓아올린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모습이 묘사되는데 여기에서 처음으로 서로 다른 두 세계가 극명하게 나뉜다. 두 번째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로, 방임에 의한 시장 운영을 옹호하는 이들과 파업과 태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이상을 외치는 이들이 영화에 대조적으로 묘사된다. 이 축(軸)은 영화 안에서도 매끄럽게 설명되지는 않는다. 자유주의를 제창하면서도 보호무역을 두둔하는 사람들, 노동자의 권익을 부르짖으면서도 조합의 역할에 회의적인 사람들에 의해 넓은 정치적 스펙트럼이 펼쳐진다. 그것도 아니라면, 곤란에 빠졌던 마틴 에덴을 돌봐주었던 마리아처럼 ‘꿈이 아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좇아’ 살아가는 현실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마틴 에덴은 사분면의 어느 좌표에 위치하는가? 이 대목에서 신기하게도 근래 읽고 있는 <마의 산> 속 세템브리니라는 이탈리아인 교육자가 떠올랐다. 마틴 에덴과 세템브리니 모두 ‘개인’이라는 표현을 쓴다. 프롤레타리아 앞에 ‘사람’이 먼저 와야 한다는 마틴의 생각이나 이성을 발휘해 전체주의을 극복해야 한다고 보는 세템브리니의 생각이나 개별적 존재로서 사람을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 같다. 사실 마틴은 사분면의 어느 점에도 얽매이려던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어느 한 편에 확실하게 서주기를 바라는 법. 자신의 직업을 이끌어준 루스 브리센덴(사회주의자)을 존경했다는 점에서 마틴 에덴은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은 뒤에도 이러한 꼬리표는 사라지지 않는다. 독자와의 대담에서 마틴이 자신의 작품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으며, 이전에 하찮게 여기던 작품을 이제 와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것은 독자들 자신이라고 허풍 떨듯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작가로서의 마틴 에덴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끝에 가 삶이라는 겉 껍데기 말고 아무런 욕구도 남아 있지 않기에 이른 마틴 에덴은 어느 해안가에 다다른다. 나무 지팡이를 휘두르며 어기적어기적 걷던 한 노인이 뜬금없이 “전쟁이야!”하고 외치며 그의 앞을 지나간다. 마틴은 게슴츠레하게 두꺼운 눈꺼풀을 올리며 정신을 차린다. 항해하던 배는 바다 아래로 꺼지고 치열한 삶은 다시 나아간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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