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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일상/film 2020. 12. 28. 01:40
I’m so happy on the one hand, and on the other, I can’t bear it anymore.
All this hatred from everyone.
Sometimes I wish I were all alone with you in the world with nobody around us.
"본 포스팅은 많은 스포일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반쯤까지 볼 때만 해도 ‘외국인 차별’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영화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 구도에서 본다면 모로코 이민자 ‘알리’는 차별의 희생자가 되고, 그런 그와 결혼한 ‘엠미’는 구원자가 된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을 보는 동안, 그러한 도식화가 전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영화는 끝에 덧붙여지는 약간의 변주를 빼면 완벽한 순환 고리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고리 안에서 독일인이냐 외국인이냐 하는 부분은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완전히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주제를 다루는 이야기다.
영화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다른 모양으로 형태가 깨지기 시작한다. 주위의 차별적인 시선이 거두어지는가 싶더니, 알리와 엠미의 사랑이 시련에 접어든다.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인들의 문제에 의해서. 처음으로 이거 왜 이러지?!! 하고 이질감이 끼어드는 대목은, 엠미의 태도 변화다. 이민자에 대한 따가운 시선 때문에 그토록 의식하고 괴로워하던 그녀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인다. 유고슬라비아—영화가 '74년작이어서 아직 유고연방이 남아 있을 때다—에서 이민 온 일용직 동료를 소외하는가 하면, 고향 요리(쿠스쿠스)를 먹고 싶다는 알리의 말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한편 알리는 어떠한가? 알리는 노년에 가까운 엠미에게 흥미를 잃고 단골 바의 여종업원인 바바라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결국 지극히 사회적인 관점에서 조명되는 듯한 이 둘—엠미와 알리—의 관계는 대단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옮겨가게 된다. ‘원주민-이민자’의 결합 구도에서 질투와 애착이 서린 ‘연인’ 구도로 역전되는 것이다. 엠미가 알리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도 단지 홀로 사는 데서 오는 외로움 때문이 아니라, 알리가 지닌 육체적인 매력에 기인했던 것이 드러난다. 매일 샤워하고 건장한 체격을 가진 알리는 사실 독일인답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실은 부끄럽지 않은 용모와 젊음을 갖고 있다.
엠미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춤을 추며 알리에게 말한다. 나는 비록 나이가 많지만 우리는 함께일 때에야 비로소 강해질 수 있다고. 이 대사에서 사실 나는 다시 한 번 시선이 사회적인 관점으로 옮겨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민자에 적대적인 ‘낡은 독일’일지라도 민족적인 다양성을 수용해 가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민자들이 고질적으로 처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환경은 다음의 병실 장면에서도 다시 한 번 부연된다.
다시 ‘불안’의 주제로 돌아와 그래서 이 영화는 어떤 불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불안이라는 소재를 영화의 전반부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외국인 혐오에 국한해서 바라보았다면 영화를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Ängst. 불안, 걱정, 두려움이라는 것. 결국 불안은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으면서도 내 안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엠미는 늙었지만 강인하고, 알리는 젊지만 어리석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갉아먹힌 영혼뿐일지언정 아직 육체는 남아 있다.
참고로 감독(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영화에서 엠미의 사위로 직접 출연하기도 하는데 불만 가득한 표정이 어지간히 삐딱해 보이는 인상이다. 여하간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도 있구나 할 만큼 신선하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서 매우 인상깊은 영화였다. 그리하여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불안은 엠미와 알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그렇다, 불안은 영혼을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바꿔 놓았다. 최초에 입으로 베어먹은 음식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사라지듯이, 아주 조금씩 야금야금.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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