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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일상/book 2021. 3. 26. 23:50
짜증나고 열받고 가슴 답답한 날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유~머가 필요하다. 물론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별 고민 없지 집어들기도 했지만, <레스프레소>에 실렸던 길고 짧은 글들을 읽다 보면 유쾌하기도 하고 예리한 에코의 통찰력에 놀라기도 한다. <서로를 이해하기> 챕터에서는 처세술을 풍자하고, <스펙터클 사회>에서는 미디어의 과잉—또는 테크놀러지의 과잉—이 가져온 새로운 아노미 현상들에 대해 얘기한다. 90년대까지 새로이 등장했던 미디어로 컴퓨터와 팩스를 움베르토 에코는 이야기하지만, 여기에 스마트폰을 끼워넣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우리가 혁신적이라고 일컫는 기술들이 사실은 인간을 또 다른 우매함으로 이끈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에 적극(x1000) 공감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유머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챕터는 <미래에 대처하기> 부분이었다. <죽음에 담담하게 대비하는 방법>에서는 아이러니에 가득한 세계를 가볍게 조롱하고,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에서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성직자・철학자・정치가들을 등장시켜 재치있게 입담을 풀어낸다. <카코페디아 발췌 항목>은 또 어떠한가? <무입력 기계와 무출력 기계>, <브라샤무탄다의 사상>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서 던질 수밖에 없는 삶의 아주 근원적인 질문을 개성 있게 전개한다.
이해하기가 조금 난해했던 파트는 단지 <성조기> 파트뿐, 꼭 마음에 드는 책이다. 이 책의 영문판과 불문판에서 어떤 번역이 시도되었는지 곁들여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의 번역도 아주 마음에 든다. 움베르토 에코와 같은 해학과 날렵함, 유쾌한 삶의 방식을 다시 볼 수는 없지만, 아직 읽어야 할 에코의 책이 남아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a^ [fine]
그의 얘기를 중단시키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건 벽에 대고 지껄이는 거나 진배없다. 그는 내가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거기에 있다. 설령 내가 눈이 세 개 달리고 후두부의 초록색 비늘에 안테나 두 개가 솟아 있는 외계인이라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도대체가 다양성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존재 가능한 세계들>의 상이성과 비교 불가능성에 대한 개념이 없다.
—p. 141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이론적인 틀의 놀라운 전도(顚倒)를 목격하게 된다. 즉, 무해한 얼간이를 조롱하던 희극적인 인물은 퇴장하고 자기의 박약성을 스스로 드러내며 아주 행복해하는 정신 박약자를 직접 등장시켜 스타를 만든다. 누구도 불만이 없다. 바보는 자기를 드려내서 좋고, 방송사는 배우에게 보수를 지급할 필요 없이 쇼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좋고,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가학증을 충족시키면서 타인의 어리석음을 조롱할 수 있어서 좋다.
……동네의 백치가 매우 즐거워하면서 스스로를 드러내면, 우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웃을 수 없다. 이제 바보를 비웃는 것은 다시금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 이른바 <정치적으로 반듯한> 태도가 되었다.
—p. 154~155
맥은 예수회의 <연구 방법ratio studiorum>이 깃들어 있는 반개혁적인 가톨릭이다. 맥은 까다롭지 않고 사근사근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신자가 따라야 할 절차를 차례차례 일러 줌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어렵지 않게 하늘의 왕국, 아니 문서 인쇄라는 마지막 순간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가톨릭의 교리 문답이 그러하듯이 계시의 핵심이 간결하고 알기 쉬운 표현으로, 그리고 화려한 아이콘으로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래서 지지하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그에 반해서 도스는 프로테스탄트, 더 정확히 말해서 칼뱅파 프로테스탄트이다. 즉, 성서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고민스러운 판단을 요구하고 세심한 해독을 강제하며, 누구나 다 구원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일깨운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일련의 개인적인 해석 행위가 없으면 컴퓨터 시스템을 작동시킬 수 없다. 사용자는 쾌남아들의 자유분방한 공동체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 자기 내면의 강박 관념에 갇힌다.
—p. 183~184
그런데 애석하게도 테크놀러지는 한 가지 냉혹한 법칙을 따른다. 어떤 혁명적인 발명품이 널리 퍼져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그 법칙이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테크놀러지는 본래 민주적이다. 하지만 소수의 부자들이 이용할 때만 그것이 제 기능을 발휘한다. 가난한 사람들까지 그 신기술의 혜택을 받기 시작하면 기능에 이상이 생긴다.
—p. 206
궐련과는 달리 시가에는 프롤레타리아적인 속성이 전혀 없다(냄새가 역겹고 모양은 흉하지만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의 맛 좋은 시가 토스카노를 제외하고), 시가는 비싸고 시간과 돈을 요구한다. 서민들은 시가 하면 대개 대기업가나 정치인을 연상한다. 시가를 남에게 선물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것이다. 친구에게 궐련 한 개비를 달라고 하듯이 시가 한 대를 빈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담배 한 대만 주시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군소리 없이 담배 한 개비를 그에게 내밀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한 갑을 통째로 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선심을 슨다고 해서 남들이 당신을 넉넉하고 인심 좋은 사람으로 보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시가 통을 열어 당신에게 아주 비싼 시가 네 대를 선물한다면, 당신은 마치 자기의 에메랄드 반지를 빼서 남에게 주는 옛날의 어떤 세도가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p. 222~223
옛날의 도덕은 우리 모두가 스파르타 사람이 되기를 원했지만, 오늘날의 도덕은 우리 모두가 시바리스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p. 241
「다만, 명심할 것이 있네. 우리 주위에 있는 50억의 사람들이 모두 바보라는 확신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심하고 사려 깊은 노력의 결과라는 것일세. 귀고리 코걸이 달고 찢어진 청바지 입고 껄렁대는 날라리들은 꿈도 못 꿀 일이지. 재능도 있어야 하고 땀도 흘려야 하는 거지. 모든 걸 한꺼번에 이루려고 하면 안 되네. 조급하게 굴지 말고 천천히 나아갸야 해. 시간에 딱 맞추어 담담하게 죽을 수 있게 말일세. 하지만 죽기 전날까지는 이 세상에 바보가 아닌 존재,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가 하나쯤은 있다고 생각해야 하네. 그러다가 적절한 순간에—미리 하면 안 되고—그 사람 역시 바보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일세.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가 담담하게 죽을 수 있을 걸세.
그러한 지혜를 얻는 방법은 보편적인 사상을 조금씩 조금씩 공부해 가면서 세대의 변화를 세심하게 살피고, 미디어의 정보와 자신만만한 예술가들의 주장과 제멋에 취한 정치가들의 발언과 비평가들의 난해한 논증을 매일매일 분석하고, 카리스마적인 영웅들의 제안과 호소와 이미지와 외양을 연구하는 것일세. 그래야만 결국 그자들 모두가 바보라는 놀라운 계시를 얻게 될 테니까. 그러나고 나면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는 것이지……」
—p. 289~290
5. 이상에서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이 나온다. 무출력 기계는 생각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고(설령 부정 존재론적인 논증에 바탕을 둔다 할지라도), 그것의 부재도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사유 발전의 현 단계에서는 그것의 사유 불가능성조차도 증명할 수 없다. 무출력 기계를 생각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데에는 부정이나 비존재를 생각할 수 없음이나 생각할 수 있음에 관한 모든 논증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무출력 기계에 관해서 우리는 그것이 생각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부정의 소멸 법칙에 따라서 우리는 (a)그것이 생각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고, (b)그것이 생각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으며, (c)그것이 생각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생각될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p. 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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