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가장 두려운 것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리디큘러스 시범을 보이는 루핀 교수 앞에는 보름달이 나타난다. 보름달이 뜨면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루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다름아닌 보름달이다. 그와 마찬가지다. 내가 리디큘러스 수업에 들어간다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이 단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죽음’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다. 죽으면 내가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있음(有)도 없음(無)도 아닌 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인지, 내 존재의 크기는 얼마나 줄어드는 것인지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어서 두렵다. 앞으로의 상황이 생각보다 너무 유동적이어서 알 수 없고, 그래서 두려운 것들도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몇 살까지 할 수 있을지, 얼마나 많은 경쟁을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두려울 때가 있다. 그런 두려움을 다른 말로 불안이라고도 한다.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불확실성을 인지하고 감수하면서 살아간다. 산다는 것이 뭔지 알기 때문에 사는 사람은 없다. 아주 오래 전 옛날 사람들은 사냥을 나갔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냥에 나섰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서는 언제 노역과 전쟁에 동원될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어진 삶을 버텼다. 노동에 혹사 당해서 중병을 앓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고,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것도 낯선 사건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온갖 정보가 빠르게 유통되고 구체적인 권리 개념이 있는 지금은 훨씬 마음 편히 살아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종종 생존 차원에서 불안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불확실성과 불안감의 총량은 수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생존’을 바라보는 관점은 예전과는 아주 약간 달라지기는 했다. 지금은 신체적인 안전을 걱정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열등해지는 것을 걱정한다. (때로는 정말 신체적인 안정을 걱정할 때도 있다.) 옛날에도 신분에 차등이 있었고 격렬하게 종교 전쟁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공평한 세상이고 이데올로기가 그리 위세를 떨치는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적자(適者)를 가려내는 매커니즘은 견고하게 작동한다. 때로는 낙인, 때로는 열외의 방식으로. 겉으로 보이는 양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런 기제가 오늘날에는 예전만큼 적나라하게 작동하지 않을 뿐이다. 총량 불변. 마녀 한 명을 불사르며 모처럼 마을의 구경거리를 자축하던 중세와 달리, 지금은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어느샌가 조용히 침습하는 방식으로 성가신 괴롭힘가 벌어진다. 그래서 뭐가 문제이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럴 때는 두렵다. 마치 게릴라전처럼 적(敵)은 눈에 띄지 않지만 국지적이면서 집요한 공격을 방어해야 하는 현장에 있는 것 같다. 또는 평화로운 길거리에 아무 예고없이 들이닥칠지 모를 자폭 테러리스트를 경계한다고 해야 할까. 타격감이 좋은 크고 작은 충돌들. 그리고 소란이 있은 뒤 일상감을 되찾기 위해 몰두하는 현란한 오락거리들과 가벼운 소비들. 타성.
사람 사는 건 결국 수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희극은 흩어져 있고, 비극은 항상 존재한다. 희극은 비극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해초더미 같다. 그리고 ‘알 수 없다’는 것은 나를 그 비극의 심연으로 이끈다. 한 사회에서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칠 때에는 희극을 건져올리기 위해서보다는 비극을 헤쳐나가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하지만 종종 누군가를 신뢰하고 생각을 나누기에는 우리 사회가 그리 건강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배는 좌초된 것 같다. 그저 모두가 길을 잃은 게 아닐까. 그럴 때는 다시 한 번 망망대해에 떠 있는 듯한 고립감과 마주하게 된다. 결국 믿을 건 나 하나밖에 없겠다며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부지런히 머릿속에 각인해 둔다. 그런 끝모를 불안감을 그러모아 덧없는 다짐을 되새긴다. Et ça brûle au fond de m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