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거세게 비가 오는 날이었다. 지하철역 근처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승객들의 우산에서 흘러내린 빗물, 옷에 스민 물기로 버스에는 습기가 가득했다. 맡은 소임을 해야 한다는 듯 에어컨은 버스 안에 냉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내 옷차림—폴로 셔츠에 얇은 면바지—역시 한여름 복장으로, 우산을 썼는데도 비를 맞고 나니 마치 가을비에 젖은 것처럼 추웠다. 별 수 없이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뿌옇게 김이 서린 차창 밖을 넋놓고 바라본다. 버스 안 한기에 승객 모두 풀이 꺾인 것 같다.
그럼에도 완벽한 정적이란 없어서 어디선가 무거운 공기를 뚫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온다. 버스의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갔다 섰다를 반복하는 버스의 엔진 소리와 함께. 빗길 위 차창 밖을 바라보며 지루한 몽상에 빠졌다가 귓전을 때리는 대화에 주의를 빼았겼다. 이제 바지의 정강이 부분이 완전히 눅눅해졌다. 접은 우산이 바지에 닿으나 안 닿으나 차이가 없게 되었다.
'걔 아직 살아있구나' 다시 둘의 대화가 내 귀에 맴돌았다. 무심한 그 한 마디. 누군가의 생사를 알리는 억양이 이렇게 무미건조할 수 있을까. 이때 '살아있음'이 생물학적으로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 리 없다. 사회적인 생존 여부를 묻는 것에 가깝다.
'살아 있다'라는 말이 이처럼 넓은 의미로 활발히 쓰이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인 것 같다. 우리는 누군가의 근황을 오랜만에 접하면 '걔 살아있었구나' 말하곤 한다. 때로는 SNS, 때로는 가까운 친구의 전언을 통해 누군가의 '생사'를 접한다. 미디어와 네트워크의 발달 덕에 사회적인 생사를 아는 일은 한층 간편해졌다. 재난현장에서 쓰이는 의미와는 다른 맥락과 무게에서 누군가의 살아 있음이 대화의 도마 위에 오르내린다.
사회적 생사를 확인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의외로 감흥이 없거나 한 번의 소빗거리인 경우도 있다. 우리의 관계는 생각보다 얄팍하다. 잠깐의 생사 확인은 손쉬운 비교준거를 마련해 준다. 살아 있고 아니고는 딱 그만큼의 의미를 띤다.
나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또는 오고가는 대화 속에 어떤 존재로 살아 있을지 알 수 없다. 생사는 공유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안녕한지(安否)에는 둔감한 오늘날의 인간관계, 인간관계들. 관계의 현대적 정의란 이런 게 있다면 이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