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비 내리던 날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11. 4. 22:31
후둑후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분명 밖을 나설 때부터 비가 오려나보다 생각은 했지만, 어제와 다름없이 맑겠거니 별 고민 없이 걸음을 떼었다. 그런 걸 보면 생각보다도 행동에 습관이 더 깊이 배어드는 것 같다. 몸에 밴 습관은 물에 젖은 실타래보다도 떼어내기 어렵다. 다행히 한낮에 내리던 비는 두어 시간 내리고 그쳤다. 날이 완전히 개이지는 않았지만 더 비가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린 뒤 평소에 다니던 길을 빙 돌아서 걸어본다. 꿉꿉한 가을비가 지나가고 나니 올해 단풍을 보는 것도 거의 마지막이겠구나 싶었다. 가을이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한 해 동안 내가 걷던 길에 단풍나무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길가에 불그스름하게 잎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것들은 올봄 흐드러지게 흰꽃을 머금었던 벚나무들이다. 봄엔 이 길에 벚나무가 많은 것이 마음에 들었었다. 하지만 가을이 되고 보니 이 길에 단풍나무가 없는 것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길의 왼쪽으로는 빗물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 은행나뭇잎들이 어지러이 보도블럭을 뒤덮고 있었다. 올해는 쿰쿰한 은행열매 냄새도 맡아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이만큼이나 도약했다니.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벚나무들과 달리, 은행나무에는 아직 샛노란 잎들이 빼곡하다. 이 녀석들은 제법 시간의 중력을 잘 견디는 것 같다. 시간의 변화를 알리는 이런저런 지표들을 살피며, 나와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지표 삼아 이 변화의 흐름을 인식할까, 내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덧없음을 느낄까 생각해 보았다.
'주제 없는 글 > Miscellaneo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턱에서(on the threshold) (0) 2021.12.31 Ça brûle au fond de moi (0) 2021.12.01 안부(安否) (0) 2021.08.26 Une étoile me cache (0) 2021.06.06 안녕, 신촌 (0) 2021.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