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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에서(on the threshold)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12. 31. 12:57
햇수로 또 한 번의 문턱을 넘는다. 올 한 해도 또 하나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그 문턱을 넘는다고 더 이상 남다른 감회가 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편의로 만들어 놓은 문턱일 뿐이다.
올해는 내가 언젠가는 죽겠구나, 내 존재는 정말로 유한하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편의상 인생의 3분의 1을 살았다고 한다면, 조금씩 남은 인생의 끝이 보이는 느낌이랄까. 걸어가는 길 저 멀리로 죽음이라는 성채가 꼭대기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일시정지 버튼 같은 게 공기 중에 불쑥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다. 잠시 멈추고 싶다.
많은 것을 챙겼지만, 많은 것을 잃었고, 결과적으로 이룬 것도 이루지 못한 것도 없이 바쁘게 살아온 것 같다. 내 중심은 단단했지만, 그 단단함을 과대평가했는지도 모르겠다. 점점 더 내면의 궁핍함을 느낀다. 가까운 풍경들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추억과 상념만이 뒤범벅되어 망막과 뇌수에 끈덕지게 들러붙는다.
생각하거나 느낄 겨를도 없이 모든 사건이 삽시간에 지나가버린다.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내 안에 축적되는 것은 없지만, 나라는 존재의 형태는 조금씩 바뀌어 간다. 대개는 마모되어 간다.
생각을 깊이 하면 안 된다는 말은 정말로 일리가 있다. 인생에서 의미를 구해서 안 된다는 말은 정말로 일리가 있다. 남들이 웃을 때 웃고 울 때 울면 그만이다. 인생의 남은 여정은 더 이상 힘주어 걷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걸어야 할 것이다.'주제 없는 글 > Miscellaneo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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