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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걷는다는 것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2. 8. 25. 23:06
[도시의 풍경] 서울의 풍경은 해를 거듭할 수록 발전하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대략 2002년 월드컵 때의 서울과 비교하자면, 지난 20년 사이 서울의 거리는 몰라볼 정도로 정갈하게 정비되었고 오래된 건물들은 새롭고 시원한 건물들로 대체되었다. 세종대로나 강남대로, 여의대로를 걷다보면 마천루가 즐비한 해외 유수의 도시가 부러울 게 없다. 성냥갑같던 아파트들도 근래에는 타워형 아파트로 바뀌면서 주거지의 풍경 또한 퍽 달라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보행습관] 아이러니한 점은 지난 10년간 사람들의 보행습관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는 것이다. 나날이 번듯해지는 도시의 외관과 달리,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보행습관은 때로 참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인도와 횡단보도를 사선으로 걷는 건 기본이거니와, 충돌 직전이 되도록 스마트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보행중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내가 그들이 움직일 방향과 속도를 감안해가며 걷는다. 최근에는 버스를 타고 있을 때, 정류장을 출발하는 버스가 갑자기 멈춰서는 경우가 부쩍 늘었는데, 열의 아홉은 스마트폰에 정신이 팔려 버스를 제때 타지 못한 행인이 다시 불러세운 경우다. 이처럼 나의 평온한 일상적 리듬에 노이즈가 끼어드는 체험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걸 하나부터 열까지 나열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공중도덕] 그런가 하면 지금은 거의 사라진 표현이지만 어릴 때는 ‘공중도덕’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었던 것 같은데, 대중교통 안에서 기본적인 매너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도 여전하다. 공중도덕의 실종에는 남녀노소가 없다는 게 특징이다. 지하철을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할 때, 옆자리에 전화삼매경에 빠진 사람이라도 앉았을라치면 일단 불안하다. 긴 거리를 앉아서는 가야 되겠고, 그러자면 듣고 싶지 않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가야 한다. 아마도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더 대화에 몰입하게 되는 모양인지, 언성의 높낮이와 호흡의 완급이 바뀌는 걸 시시각각 관찰할 수 있는 건 덤이다. 옆사람이 이어폰을 꽂지 않은 채 영상을 시청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스런 일이라 여긴다. 그리고선 듣고 싶던 음악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신경해지기 위해서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아무 음악이나 튼다.
[운전문화] 물론 이런 이야기에 잘못된 운전문화에 관한 언급이 빠진다면 섭섭할 것이다. 대형 횡단보도가 있는 도심 한복판이든 사람이 복작대는 이면도로든 운전자들에게 ‘일단멈춤’이란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운전문화. 인도를 자유자재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킥보드나 오토바이까지 갈 것도 없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려는 사람이 다리를 들여도 될지 머뭇거릴 때, 운전자는 먼저 지나가겠다는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겠다는 듯 감속이 아닌 가속을 택한다. 얼마전 비보호 횡단보도에서 길 건널 타이밍을 잡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를 본 운전자가 고맙게도 비상등을 깜빡이며 지나가라는 사인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생각을 맞출 겨를이 없었던지 맞은 편 차선의 차량은 도리어 속도를 줄이지 않는 바람에 더 위험할 뻔한 적이 있다. 두 다리가 있고서야 두 손으로 운전대를 잡을 텐데, 언제부터 보행자에 대한 운전자의 비뚤어진 특권의식이 생긴 걸까.
[길이란 무엇인가] 살다보면 본말이 전도된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보행습관, 공중도덕, 운전문화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은 아주 오래되었고 운전을 하게 된 뒤에도 그런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에 6개월 체류하는 동안 내가 그렇게 유별난 생각을 하던 건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는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운전자가 길을 먼저 양보한다.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그렇다.) 심지어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은 눈치껏 서둘러 도로를 가로질러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는커녕 운전자에게 감사 표시의 제스처를 잊지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이곳에서 횡단보도 신호등은 어디까지나 걷는 이의 보행을 돕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인 셈이다. 길 위에서 최우선시되는 건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도 파리 사람들은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 비해 파리의 보행 환경이 열악하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런 환경 안에 있으면서, 그동안 내가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지키고 살아온 건, 규칙을 준수하는 상식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치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길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이동(mobility)을 위한 것이다. 이때 이동의 주체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 우리나라의 도로 위는 자동차와 스마트폰이 주인인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동차와 스마트폰에 매달려다니는 부속품 같다. 운전대와 스마트폰만 잡으면 도구에 의탁한 새로운 인격체가 된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보행자나 운전자는 길—인도든 차도든—에서 사람답게 이동할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 누군가는 오늘날의 발달된 기술이 가져다주는 속도의 효율과 편안함,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만 기분 산뜻한 통행로를 ‘길’이라고 부를 순 없을 것이다. 길은 독점(獨占)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길 본연의 기능을 망각한 채 자신의 주의력을 길 아닌 곳에 쏟으며 길을 다니므로, 점점 더 커져가는 도로 위의 불쾌함과 불편함을 되는 데까지 견뎌보기로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길을 길답게 쓸 수 없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다시 본말이 전도된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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