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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3일의 일기: 건축기행—파리 북부Vᵉ arrondissement de Paris/Avril 2022. 4. 23. 17:21
요즈음 교정에 꽃이 많이 피었다 오전에는 노동경제학 페이퍼를 어떻게 써야할지 요리조리 굴려보다가 오후에는 바람을 쐴 겸 밖으로 나섰다. 아직 루브르 박물관, 오랑주리 미술관, 로댕 미술관, 모네 미술관, 팔레 드 도쿄 등등 가보지 못한 곳이 많지만, 오늘은 바깥 바람을 좀 쐬고 싶었다. 5호선을 타고 포흐트 드 펑탕(Pte de Pantin) 역에 내려 라빌레트 공원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장 누벨의 또 다른 건축물이 있는데 바로 파리 필하모니 콘서트홀이다. 이쪽 방면은 지난 번 랭스에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뭔가 독특한 현대 건축물이 있는 걸 보고 한 번 둘러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팡테옹이 삼색 국기로 크게 장식되었다 콘서트홀은 겉보기에도 매우 독특하게 생겼다. 전반적으로 매끄러운 건축물 정중앙에 마치 용암이 흘러내리듯 형체가 무너진 입이 헤 벌리고 있는 것 같다. 멀리서 보면 건물이 빛을 반사하는 메탈 소재로 되어있어서 광판마다 다른 빛을 튕겨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 가까이서 보면 메탈소재이기는 한데 그냥 서로 다른 색깔이 칠해져 있다. 또 모두 메탈 소재로 덮여 있는 게 아니라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된 부분들도 있어서 건축 공법에 세심하게 신경을 쓴 게 느껴진다. 콘서트를 보러 온 게 아니다보니 내부까지 둘러보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지만 발걸음을 옮겼다.
philharmonie de paris 라빌레트 공원을 절반으로 가르는 수로—이 수로는 생 마르탱 운하와 이어진다—방면으로 쭉 걸어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로 근처에 있는 211이라는 카페에서 카페 라테를 마시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오늘 오후 비 예보가 있기는 했지만, 내심 비가 안 오고 끝나거나 잠시 소나기가 내리고 그치길 기대했었다. 카페 안에는 무슨 모임인지, 알 수 없는 캐릭터로 정성껏 코스프레한 사람들이 20~30명씩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Parc de La Villette Parc de La Villette 비가 그친 뒤 과학과 산업 박물관 방면으로 걸었다. 이곳은 아드리앙 팡실베(Adrien Fainsilber)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유럽에서 가장 큰 과학 박물관으로 소개되고 있다. 사실 다른 것보다는 스테인리스로 된 구(球) 모양의 건축물이 가장 시선을 잡아 끈다. 지도를 보면 이곳은 영화관으로 표시되어 있다. 바로 옆에는 잠수함을 구경할 수 있는 체험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라빌레트 공원을 둘러보면서 다시 한 번 도시 한복판 공간을 넓게 쓰는 모습에 놀랐다.
Parc de La Villette 쥘 베른의 회전목마라고 해서 탈 것들이 쥘 베른의 소설에 묘사되는 것들로 만들어져 있다 양떼 치는 법을 시연하는 듯하다 # 라빌레트 공원을 어느 정도 둘러보고 19구로 나왔다. 뷔트 쇼몽 공원을 왔었기 때문에 19구에 오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시내 안으로 나와보는 건 처음이다. 라빌레트 공원을 나서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상당히 묘하다. 날씨가 흐린 탓도 있겠지만 파리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슬럼화된 지역이라는 느낌이 든다. 특히 나는 플렁드르 대로(Av. de Flandre)를 따라서 걸어내려 왔는데, 처음에는 치안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들고 다니던 카메라를 점퍼 안으로 집어넣었다. 일단 백인은 거의 보이지 않고 흑인이거나 중동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히잡을 둘러쓴 사람들도 파리의 다른 지역들보다 많이 보인다. 그런데 또 계속 대로를 따라가다보니 분위기에 적응이 되기도 하고 예전에 인도 여행을 하던 생각도 나서 친근한(?) 느낌도 들었다.
Cité des sciences et de l'industrie 백주대로를 걸으면서도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을 연신 간수하면서 걸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은 이유는 오흐그 드 플렁드르(Orgues de Flandre)를 들르기 위해서였다. 이곳 여기저기에 ‘플렁드르(Flamdre)’라는 이름이 붙은 건 19세기부터 이 지역에 포흐트 드 플렁드르(Pte de Flamdre)라는 도시의 관문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관문이라기에 이 지역 자체가 19구의 꽤 안쪽에 자리잡고 있고, 1970~80년대 5차례에 걸쳐 주거 공간으로 재개발되어서 문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관문(Porte)이라는 말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할 것이다.
Cité des sciences et de l'industrie Cité des sciences et de l'industrie 이 주거 공간에 대신 붙은 이름 오흐그 드 플렁드르(Orgues de Flamdre)는 우리말로 하면 ‘플렁드르의 오르간’ 정도가 될 텐데, 그 이름의 의미는 이곳에 지어진 건물들을 보면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 아파트들이 마치 교회 벽면에 붙은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독일 건축가 마르틴 슐츠 판 트렉(Marti Schulz van Treek)에 의해 설계된 이곳에는 파리 시내에서 보기 어려운 제법 고층의 아파트 단지다. 그런데 그 모양이 상당히 독특해서 건물들이 아슬아슬하게 지그재그로 사선을 그리고 있다. 아마 지어질 당시에는 혁신적인 느낌을 주었겠지만, 반 세기가 지금에 와서는 노후된 느낌이 없잖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매우 독특한 풍경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Orgues de Flandre Orgues de Flandre Orgues de Flandre Orgues de Flandre # 히케(Riquet)와 스탈린그라드(Stalingrad)를 차례로 내려와 내가 향한 곳은 에스파스 니마이어(Espace Niemeyer)다. 콜로넬 파비앙 광장(Pl. du Colonel Fabien) 광장에서 의외로 쉽게 놓치기 쉬운 건물이다. (나 또한 지난 번 이 길을 지나왔음에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쳤다) 이곳은 프랑스에 산재한 공산당원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1965년 지어진 건축물로, 브라질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에 의해 설계되었다. 오스카 니마이어라면 신행정수도인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의 건축설계를 이끌면서 당시에도 이미 유명한 건축가였고, 그 자신도 브라질에서 공산당원이었던 데다 당시 파리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 본부 설계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공산당과 관련해 좋은 역사적 기억이랄 게 없지만,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는 공산당이 (산재되어 있을지언정) 꽤 세력을 규합하고 있는 모양이어서, 그건 그 나름대로 신기하다.
Orgues de Flandre 파리 중심의 협소한 공간이기는 하지만 니마이어의 모더니즘이 충분히 드러나는 공간이다. 오스카 니마이어는 신행정수도의 건축사업에 참여하고도 군부 우파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부를 장악하자 활동 입지가 좁아지면서 파리로 망명, 64년부터 20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약간 언덕진 곳에 건물이 지어져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좀 더 좋을 것 같은데 아쉬움도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브라질리아에 지은 건축물들에도 관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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