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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의 일기: 결선 투표Vᵉ arrondissement de Paris/Avril 2022. 4. 24. 20:50
# 일요일 아침 카페에서 페이퍼를 쓰다가 아무래도 어깨 근육이 뭉치는 느낌이 들어서 오전 열한 시 쯤 되어서 일찍 카페를 나왔다. 기숙사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뒤 급(?)조깅에 나섰다. 일단 고블랑(Les Gobelins)으로 이동했다. 길을 걷다보니 처음 보는 풍경인데 일요일 무프타흐 시장 일대에 벼룩시장이 섰다. S.P.A.M.이라는 문구가 천막마다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일종의 조합 같은 곳에서 여는 게 아닌가 추측할 뿐인데, 파는 물건들의 구성이 방브 벼룩시장과 비슷해서 잠시 혹했다.
일단 고블랑에 도착한 다음, 플라스 디탈리(Pl. d’Italie), 센 강, 식물원을 직사각형으로 주파하는 이전의 코스를 달렸다. 지난 번보다는 수월한 느낌이었다. 오늘은 프랑스 대선의 결선 투표가 진행되는 날이다보니 관공서마다 투표를 하러 온 시민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또 오늘따라 도로마다 사이렌을 울리며 줄줄이 달리는 경찰 차량들도 눈에 띄었다.
식물원에서는 공휴일을 맞아 소규모 행사가 열리고 있어서 가족 단위의 인파가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무프타흐 시장 초입에서 30분 여 조깅을 마치고 몽주 광장으로 이동해 통닭(Coquelet)을 한 마리 샀다. 지난 번 장을 보러 왔을 때 눈여겨 봐두었었는데, 한국식 치킨이 마땅히 없다보니 통닭이라도 좀 샀다. 6.5유로.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 오후 기숙사에서 쉬다가 프레타 멍제에서 다시 노동경제학 페이퍼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 일곱 시쯤 되어서 팔레 드 도쿄로 나섰다. 오늘은 자정까지 팔레 드 도쿄가 열리는 날이다. 팔레 드 도쿄는 시간을 잘 맞춰서 가면 30분 단위로 특정 전시구역을 무료로 개방한다. 어쨌든 자전거를 타고 자유의 불꽃(La Flamme de la Liberté) 동상까지 나갔다. 자유의 불꽃은 1886년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자유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성화(聖火) 속 불꽃과 실제 동일한 크기, 동일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지금은 알마 교(pont de l’Alma) 북단의 터널에서 차량사고로 사망한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를 추모하는 공간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에 금융위기가 터졌던 1997년 파리 한복판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에 대한 뉴스는 나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노랗게 도금된 자유의 불꽃 동상 앞에는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기리는 문구와 생전 사진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 결선 투표가 마무리된 8시를 조금 넘겨서 프랑스 대선 결과 예측을 살펴보았는데, 에마뉘엘 마크롱이 58% 득표로 재선임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실제 에마뉘엘 마크롱이 59%를 득표하고 마린 르펜이 41%를 득표했는데, 2017년 66:33의 득표율과 비교하면 표심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어쨌든 공화당의 사르코지, 사회당의 올랑드가 단임 정부로 끝났던 것에 비해 모처럼만에 프랑스에 연임 정부가 탄생했다. 하지만 개선되고 있는 프랑스의 각종 경제 지표에도 불구하고 에마뉘엘 마크롱은 독선적이고 오만하다는 일반 시민들의 인식을 달랠 수 있는 리더십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 파리 16구 노른자위 땅에 ‘팔레 드 도쿄’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근현대 미술관이 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는 조금 흥미롭다. 그 이름 안에 ‘도쿄’라는 명칭이 들어가지만 사실 이 건물은 뉴욕 대로(Avenue de New York)에 면하고 있어서 어쩌다 미술관 이름에 먼 동양의 도시명이 들어갔는지 궁금증이 더해진다. 원래 팔레 드 도쿄 건물은 1937년 파리 엑스포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이 당시에 지어진 것이 에펠탑이기도 하고, 이 에펠탑을 둘러싸고 크게 세 동의 박물관이 지어 올려졌는데 그게 지금의 샤이요궁과 이에나궁, 그리고 도쿄궁—팔레 드 도쿄—다.
당시 건물이 지어질 때만 해도 도쿄 강변(quai de Tokio)에 지어졌다 해서 팔레 드 도쿄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도쿄 대로(Av. de Tokio)라는 이름 자체는 원래 ‘드빌리 강변(quai Debilly)’이라 불리던 도로명이 1918년 개정된 것으로, 당시만 해도 세계 1차 대전에서 일본이 프랑스와 동맹이 되어 독일에 맞섰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테헤란로처럼 다소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서 주어진 명칭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정치적 목적을 띠었던 만큼,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추축국으로 전환되고 1945년 패전국이 되자 이 도로의 이름은 지금과 같은 뉴욕 대로로 바뀌게 된다.
팔레 드 도쿄 건물 자체는 사실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에 비하면 밋밋하다. 양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현대 미술관이라는 명목을 잇는 와중에도 미술관의 기능은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70년도에 퐁피두 센터가, 80년도에 오르세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팔레 드 도쿄가 소장하고 있던 많은 작품들이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팔레 드 도쿄의 서쪽 건물은 여전히 여러 현대 미술품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해마다 수많은 방문객이 찾는 곳이다.
소개된 미술품들은 퐁피두 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실험적인 느낌이 강하다. 퐁피두 센터가 4층에 소개하고 있는 작품들도 매우 방대하고 다양한데도, 팔레 드 도쿄의 작품들은 퐁피두 센터에 소개된 작품들보다 사회적인 함의를 더 많이 담고 있고 공간을 더욱 넓게 활용하는 설치미술이 많다. 현재 진행중인 전시는 영상물이 많이 마련되어 있어서 암실에서 다큐멘터리 필름 하나를 가만히 시청하는 것 자체가 휴식이 된다. 전시공간을 워낙 널찍하게 쓰다보니 전시 분량이 다른 미술관에 비해 적다고도 할 수 있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미술관 내 서점은 둘러볼 만한 가치가 있다.
# 어쨌든 에펠탑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파리 한복판에 도쿄라는 이름이 들어간 건축물이 있다는 것 자체는 그간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든지간에 일본의 외교력이 만들어낸 커다란 성과가 아닌가 싶다. 팔레 드 도쿄를 나온 다음에는 에펠탑이 가까워질 때까지 센 강변을 따라 걸었다. 지난 번 샤이요궁에 왔을 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에펠탑에 거의 다 도착하고보니 야경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대선이 있는 날이어서 그런지 프랑스 삼색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눈에 띄고, 경찰차들도 빽빽히 들어서 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야경을 더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도 할 겨를도 없이 82번 버스를 타고 뤽상부르 방면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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