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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의 일기: 능력주의(méritocratie)의 망령Vᵉ arrondissement de Paris/Avril 2022. 4. 22. 16:29
# 오늘은 MD의 마지막 수업이 있는 날이다. 간단한 구술 평가가 있을 거라고 했는데, 후반부에 접어든 이번 학기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과 소회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단은 이곳에 머물고 수업을 들으면서 프랑스어가 많이 편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오고 갔다. 9월에 도착해 1학기부터 수업을 들은 학생도 있고, 나처럼 1월에 도착해 2학기부터 수업을 시작한 학생들도 있는데 모두 자신의 프랑스어 실력에 진전이 있었다고 느꼈다.
언어적인 것 이외에 학사행정과 관련해서는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오고 갔다. 행정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는 의견이 가장 먼저 나왔다. 다음으로 예고되지 않은(imprévu) 휴강이나 수업일정 변경이 있을 때마다 곤혹스러웠다는 의견도 나왔다. 또 토론식 수업이 주를 이루는 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교수가 일방향적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편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수업 외적인 측면에서는 프랑스인들의 애국심이 유난히도 강한 것 같다는 의견도 나왔다.
학기 초부터 수업에서 드문드문 마주쳤던 P는 다른 학생들과는 조금 다른 의견을 주었다. 영국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그녀는 학교로부터 숙소를 제공받지 못해서 공동주거(colocation)를 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교환학생이 아닌 에라스무스나 다른 형태로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보니 제한적으로 혜택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곳 프랑스 학생들과 어울리기가 상당히 어려웠다고 했다. 자신의 프랑스어 실력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이곳 학생들은 소그룹을 이뤄 폐쇄적으로 어울리는 문화가 있어서 프랑스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도 자연스레 어울릴 기회가 없었다고 했다.
같은 학교에서 온 옆의 친구는 이곳 학생들의 엘리트 의식에 대해서 언급했다. 커다란 대학(l’université)인 영국의 대학들과 달리, 프랑스의 그랑제꼴들은 소규모 학교(l’école)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익명성이라는 게 보장되기 어렵다. 거꾸로 말하면 이곳 고등사범학교라는 네트워크에 일단 들어온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익히 아는 만큼 결속이 강하고 또 그만큼 외부인을 구분하는 경향 역시 강하다는 것이다. 사실 영국도 이런 경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영국 학생들이 이런 고충을 얘기하는 게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이곳 학생들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야기가 능력주의(méritocratie)로 옮겨갔다. 자신들이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이곳 학생들. MD는 프랑스의 입시 과정이 굉장히 까다롭기는 하지만 단지 좋은 그랑제꼴에 입학한 사람들이 능력만으로 선별되었다(sélectioné)고 묘사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했다. 어찌보면 복잡다단한 선발 과정을 무사히 마친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고 (물론 '무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파리의 명문 고등학교에는 입시 프로그램이 더 잘 갖춰져 있어서 공립 고등학교보다 좋은 그랑제꼴에 보낼 수 있는 기반이나 경로가 잘 닦여 있는 편이라고 했다. 때문에 파리의 명문고를 보내기 위해 파리에 사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거주지를 옮기려 한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자녀만이라도 파리에서 수학할 수 있도록 큰 비용을 지출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에서 능력주의는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이탈리아에서 온 세 명의 학생들은 서로 부족한 의견들을 보충해가면서 이탈리아의 능력주의에 대해 소개했다. 북이탈리아에서 온 학생은 이탈리아에서 능력주의가 비교적 잘 작동한다고 한 반면, 남부의 나폴리에서 온 학생은 능력주의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나폴리 근교에 사는 학생은 공교육으로부터 아무런 수혜를 받을 수 없으며, 본인이 나폴리 출신임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건 자신이 나폴리 시 안에서 태어나 온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아무리 타고난 능력이 있어도 나폴리 교외에서 교육을 받는 처지가 되고 보면 절대 능력주의가 작동한다 말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영국도 형태가 조금 다를 뿐 설명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명문 대학교의 교수들이 고등학생들에게 레슨을 해주는 루트가 있으며, 교외 레슨에 참여한 교수들이 입시 평가에서 배제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고는 하나 입시 비리가 심심찮게 문제되고 있다고 했다. 태어난 거주지가 교육이나 직업을 좌우하는 중국의 경우도 두 말할 것이 없었다. 나 역시 서울의 ‘16구’에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비율이 더 높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능력주의’라는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서도,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많은 학생들—특히 유럽학생들—이 이곳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위안 아닌 위안을 얻었다.
한편 능력(mérito)이라는 게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대로, 그리고 이곳 학생들 대다수가 묘사하는 대로 천부적인 자질뿐 아니라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사회경제적 여건을 포함하는 게 오늘날의 현실적 정의라면, ‘능력’이라는 단어가 굳이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능력주의를 기준으로 무언가가 공평하다 불공평하다고 말하기에는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그 개인이 등에 업은 사회경제적 환경을 분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은 우리가 공동체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보다도 그간 우리 사회가 역점을 뒀던 ‘능력’과 ‘능력주의’가 지금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부터가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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