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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의 일기: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Vᵉ arrondissement de Paris/Avril 2022. 4. 26. 21:39
# 늦은 오후 파리 북역으로 향했다. 원래는 당일치기로 아미앵(Amiens)이라도 다녀올까 생각했지만, 생각을 바꿔 파리 근교에 다녀오기로 했다. 랭스를 다녀올 때 동역을 이용했었고 아직까지 북역을 이용하는 건 처음인어서, RER B노선을 타고 북역을 도착한 뒤 조금 헤맸다. 북역은 복잡하기도 하고 더럽기도 하다. 지난 3개월 동안 RER B를 이용할 때도, 파리의 여러 구역들을 돌아다니면서도 위생에 크게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건만, 북역 앞 지린내는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 RER H 노선을 타고 생투앙로몬(Saint-Ouen-l’Aumône)에서 내렸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들어가려면 이곳에서 한 차례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맞은편 플랫폼으로 건너갔는데 울타리 아래로 도마뱀들이 여럿 보인다. 다른 도마뱀의 꼬리를 입에 물고 있는 녀석부터 뜨거운 철로 옆 자갈로 돌진하는 녀석까지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 넋놓고 바라보았다.
# 다른 유럽이라고 해봐야 스페인과 스위스를 가본 것이 전부여서 비교하긴 어렵지만, 프랑스는 열차가 참 잘 되어 있어서 믿고 타는 편이다. 프랑스에서 몇 안 되는 예측가능한 공공 서비스여서, 시간도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는 편이다. 전동차의 종류도 다양하고 제공되는 서비스도 다양한데다—물론 늘 2등석밖에 이용하고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2등석 안에서도 맞춤형 서비스를 택할 수 있다—교통망 또한 촘촘히 갖춰져 있어서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브르타뉴, 옥시타니 지방으로 가는 열차는 몽파르나스 역에서, 부르고뉴나 프로방스로 가는 열차는 리옹 역에서, 셩파뉴나 알자스-로렌으로 가는 열차는 동역에서, 오드 프랑스를 가는 열차나 유로스타는 북역에서, 노르망디를 가는 열차는 생라자르 역에서 탈 수 있도록 교통 역할이 고르게 분산되어 있다. 그밖에도 베르시 역이나 아우스터리츠 역을 통해서 빈틈없이 교통망이 메워진다. 특히 오늘 처음 갔던 북역은 유럽 안에서도 상당히 규모가 큰 축에 속하는 역으로, 유럽 한복판 거대한 교통망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르누보 양식이 두드러지는 파리의 메트로와 달리, SNCF에 의해 운영되는 철도 역사들은 디자인이 조금 다르다. 아무래도 장식적인 면보다는 실용적인 면이 더 강조될 수밖에 없는데, 오늘 파리 근교를 오가면서 들렀던 역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플랫폼에 서 있는 가로등이 항상 눈에 들어온다. 나무처럼 위로 올라갈 수록 가느다란 형태를 띄는데 별다른 생각없이 보다가도 세련된 느낌을 받는다. 소재는 철이지만 직선으로 찍어내는 게 아니라, 주위 풍경이나 분위기와 각을 세우지 않도록 부드러운 형태를 고안해낸 세심함 같은 게 느껴진다.
#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도착한 다음 잠시 카페에서 한숨 돌렸다. 일 드 프랑스 지역이라곤 하지만 매우 작고 고즈넉한 마을이어서 문을 연 카페도 단 한 곳이었다. (다만 프랑에서 가보았던 카페 가운데 가장 맛이 별로였다) 바로 옆에는 고흐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시청과 그가 삶의 마지막에 70여 일간 지냈던 집도 볼 수 있다. 따로 오베르 성을 둘러보지는 않기로 하고 (발드루아르에서 이미 너무 많이 봤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성당으로 향했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 그대로 생겼는데, 그림과 계절이 달라서 성당 앞 나무에 잎이 무성하다는 점만 다르다. 교회는 지금까지도 지역주민의 회합장소로 활발히 쓰이는 듯,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여 평화를 촉구하는 그림이나 안내문구가 많이 보였다.
교회를 빠져나와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다보면 야트막한 언덕이 끝나는 지점에 르 셩 드 블레 오 코흐보(Le Champ de Blé aux Corbeaux)라는 곳이 나온다. 오늘 여정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공간으로, 파리로부터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근교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싱그러운 밀밭이 끊없이 펼쳐진다. 이곳은 고흐의 <까마귀가 있는 밀밭>의 배경이 된 곳으로, 고흐는 이곳을 화폭에 담으면서 극한의 고독함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 곳이라기에는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의 묘지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들판 저 멀리로 노란 유채화 밭이 굵은 직선을 띠고 있어서 마을 외곽까지 쭉 걸어보았다. 몇 주 전 발드루아르를 갈 때도 열차 차창 너머로 보이던 유채꽃이 참 화사했던 기억이 있는데, 아직도 유채꽃은 한창인가보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사방에서 들려온다.
우리나라보다 인구는 약간 많지만 (6천 7백만 명), 국토는 5.5배가 더 크다보니 어딜 가도 전체적으로 쾌적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1인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라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를 활동무대로 삼았던 걸 보면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프랑스만이 가진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짧은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생투앙로몬(Saint-Ouen-l’Aumône)이 아닌 발몽두아(Valmondois)에서 열차를 타고 파리 북역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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