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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1일의 일기: 사람사람들(les gens)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11. 17:23
# 오후 결정이론 수업이 끝나고 센 강변을 쭉 걸었다. 파리대학에서 수업이 있는 수요일이면 수업이 끝나고 산책 겸 루브르 방면으로 쭉 걸어나갔던 기억이 많다. 오늘은 파리에 온 이후로 가장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이제 센 강변을 따라 루브르까지 걸을 일도 몇 번 남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아쉬운 생각이 들 법도 한데, 그런 미련 같은 건 잘 모르겠다. 나를 시험해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해보려고 했던 이곳. 언젠가 지난 기억도 모양을 달리 할 때가 오겠지만, 문득 내게 이곳은 영영 머나먼 타국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지난 주 몸 상태가 최악인 상태로 수업에 들어와서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는데, 결정이론에서 오늘 새로 다루기 시작한 주제는 일단 이해하기에 전혀 어려운 내용이 아니기도 했고 흥미를 끄는 부분도 있었다. ML 교수는 전형적인 프랑스 여자로 부드러운 듯한 인상에 강단과 강인함이 느껴진다. 수업이 끝나고서는 교실에 남아 오늘 수업 중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잠깐 질문을 했다.
# 수업이 끝나고 센 강변을 따라 걷다가 튈르리 공원을 가로질러 방돔 광장까지 도착했는데, 급격히 허기를 느껴 근처 프레타 멍제에서 샌드위치와 요거트를 사먹었다. 날씨가 아깝지만 카페를 나선 다음 분홍색 7호선을 타고 몽주광장으로 돌아와 몽주약국에 들렀다. 약국에서 다 떨어진 샴푸와 영양제를 하나 샀다. 내 초보적인 프랑스어를 들은 직원은 영어로 태세를 전환해 필요한 정보들을 내게 물었다.
# 프랑스 사람들은 아직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은데, 내가 지금까지 관찰하기로 이곳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징이라면 휴식을 굉장히 중시하면서도 일단 일에 착수하면 맡은 바 꼼꼼히 챙긴다는 점이다. 수요일 늦은 오후 센 강변을 따라 산책을 하면서도 이제는 날씨까지 따듯해지다보니 아예 웃통을 벗어던지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데 (요 근래 잔디밭에 수영복 차림이 등장한지는 좀 되었다), 파리 시내는 평일 오후 어디를 가도 노동과는 전혀 동떨어진 자신만의 리듬으로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이 이렇게 많으면 이 큰 도시는 도대체 언제 굴러가나, 하고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럼에도 일을 할 때는 꽤 믿음직하게 하는 편이다. 오늘 몽주약국에서 내게 필요한 물건을 골라주었던 직원도 내가 물건을 찾으니 엄청 대단한 질문들은 아닌데 내게 이것저것 증상을 물어본다. 처음에는 그냥 피로감이 누적된 것 같아서 영양제가 필요하다고 했을 뿐인데, 내 식성이나 배변 상태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지까지 알뜰살뜰 챙긴다. 그렇다고 다른 제품을 더 권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약 3~4주 분의 영양제를 주면서 어떻게 복용하면 되는지를 설명해주었는데, 요즈음 몽주약국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거의 끊겼음에도 아쉬울 게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곳 사람들의 느긋함은 장점이 되는 동시에 단점이 된다. 어느 정도 일을 빨리 쳐낼 필요가 있는 일선 행정업무에서 이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은 어마어마한 비효율을 불러온다. 반면 창의성이나 전문성을 요구하는 각 영역에 있어서는 일의 완급을 조절해 가면서, 꽤 최적의 상태로 일을 진행해 나가는 느낌이다. 이러한 장점이라는 게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건 아니어서, 프랑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만의 리듬을 찾는 데 아주 어릴 때부터 단련이 되어 있는 듯하다. 교환학생으로 온 다른 유럽 국가의 학생들과 비교해 보아도, 프랑스 사람들은 특유의 느낌이 있다. 분방함+개의치 않음+예민함+강한 자기주장+장식적인 말투와 행동들이 섞여 무 자르듯 단정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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