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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의 일기: 에릭 로메르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13. 15:09
# 오전에는 K와 오후에 있을 각자의 발표를 연습하고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여기선 단순히 글로 풀어내는 공부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토론하는 능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가장 시수가 적었던 노동경제학 수업에서마저 발표과제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오히려 노동경제학보다 시수가 많았던 수업 중에는 시험으로 평가가 이뤄지는 과목도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시험 직전 주에 잡힌 발표 일정이 퍽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K의 방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서로의 발표를 체크해주고, 점심을 먹으러 시테 유니벡시테로 이동했다. 점심을 먹으며 이탈리아에서 온 K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시테 유니벡시테의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는 건 이곳에 도착한 뒤로 처음인데, 듣던 것보다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팡테옹 캠퍼스의 식당이 더 좋기는 하다.
외국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종종 너희 나라에서는 졸업하고 나서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일이 뭐냐고 물어보곤 한다. 또 살짝 친구들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질문(각국의 사회 문제)을 던져보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경우, 다른 나라에 비해 규모가 큰 글로벌 기업이 없다보니 원래는 공공 부문에서 완전히 고용보장을 받는 걸 선호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부재정이 악화되고 공공 부문에 대한 재정 지원이 끊기면서 지금은 그냥 대체로 각 지역 안에서 큰 기업에서 일하는 걸 선호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K는 볼로냐 지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볼로냐 지역에 페라리-마세라티 공장이 있어서 그런 회사들에서 일을 하고 싶어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K가 이탈리아 각 지역의 대표 산업들을 소개하는데 모두 북이탈리아에 위치한 도시들만 얘기를 한다. 그래서 물어보니, 남이탈리아에는 일자리가 전혀 없어서 모두 북이탈리아에서 일을 찾고 싶어한다고 본인도 허탈하게 웃으며 말한다. 파리에서 만나는 유럽 출신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은연중에 남유럽을 무시하는 뉘앙스로 말을 하는 경우를 꽤 많이 본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이 G7 가운데 가장 체격이 줄어든 이탈리아를 꽤 도외시하는 느낌인데, 프랑스 안에서도 북프랑스 사람들은 남프랑스 사람들의 유쾌하고 느긋한 성품을 폄훼하기도 한다. (내가 봤을 땐 누가 누굴 한심하게 생각할 정도로 양쪽의 근로의욕에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_=) K는 이탈리아 사람이기는 하지만, 남이탈리아가 낙후되어 있다는 점과 사실 이탈리아라는 국가 자체가 통일된 외양을 하고는 있지만 대단히 인위적인 산물이라고도 했다.
# K는 집단협상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조합을 세우는 일에 직접 참여한 적이 있다고도 했다. 기본적으로 이탈리아에는 소규모 사업장이 많아서 ‘조합’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매우 다기망양한데, 그렇다보니 대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는 블루 칼라들이 만든 조합 정도만이 강한 협상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거꾸로 말하면 그러한 협상력을 활용해 점점 우월적인 지위를 굳혀가는 대규모 사업장의 노조들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라고도 했다. 그럼에도 협상력을 갖추지 못해 불합리한 근로여건에 놓인 사람들이 여전히 다수이기도 하고, IT 기업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합의 필요성이 늘어나면서 IT 기업에서 조합을 만드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는 것.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아직 정해진 직장도 없는 학생이 새로운 형태의 조합을 만드는 일에 나설 생각을 하다니.
# 오후 발표는 결과적으로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마무리가 되었다. 발표를 할 때까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러다 발표를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긴장을 했었다. 심지어 발표 순서도 가장 마지막으로 밀렸다. 발표순서를 정해주면 좋으련만,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순서를 갖고 계속 협상을 하는 통에 나는 협상의 여지 없이 마지막에 발표를 맡았다. 한국에서는 이렇게까지 긴장하지 않는 발표를 여기서는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걸까 생각을 해보자면 영어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크게 두 가지로 좁혀볼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이미 지난 학기부터 알고 지내온 이곳 학생들 틈바구니에 끼어들 수가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적잖은 학생들은 이미 고등학교에서 프레파를 준비할 때부터 서로 가까이 알고 지낸다. 실제로 유명 그랑제꼴의 입학 실적을 보면 몇몇 특정 고등학교의 비율이 우리나라의 유명 학교들보다도 한참 높다. 그렇다보니 독강도 이런 독강이 있을 수가 없는데, 이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면 어떤 때는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든다.
둘째는 이곳의 학업 시스템에 대한 적응 부족이 있다. 이곳에서 과제 자체의 난이도가 높다고 느낀 적은 많지 않은데, 관심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고—예를 들어 오늘 발표에서 한 팀은 ‘체스와 젠더’라는 완전히 생소한 주제로 발표를 했다—교수가 학생들에게 기대하는 게 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행정력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기도 하고 학사관리 방식이 한국과 전혀 반대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 어쨌든 노동경제학은 이번 학기 가장 처음으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된 수업이 되었다. 파리에서 지내면서 가장 큰 고충이라면 ‘예측가능한 것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처음으로 모든 일정이 종료되는 이 과정의 연속선상에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수업에서 잘하려고 하기보다는 방향이라도 정확하게 잡자는 생각으로 준비를 했었다. 이렇게 수업하나를 매듭짓고 나니 다른 수업들도 어떻게든 하나둘 정돈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긴장 상태에서 이완 상태로 급격이 넘어간 후, 14구 캠퍼스를 간 김에 잠시 N의 얼굴도 보고, 팡테옹으로 돌아온 뒤에는 저녁 식사를 하고서 에콜 시네마 클럽에서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봤다. 이미 본 적 있는 <녹색광선>이라는 영화다. 다시 봐도 좋다. 프랑스에서 지낸 지도 수 개월이 되어가고 파리 바깥으로도 여러 번 구경을 다녔으므로 영화 속에 낯익은 풍경이 있나 관찰하는 재미도 있었다. 한국에서 영화를 볼 당시에는 크게 생각에 담아두지 않았는데, 바캉스 문제 때문에 심통이 난 델피가 가장 먼저 선택했던 행선지가 바로 셰르부르다. 영화가 만들어진 1980년대 후반의 풍경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내가 다녀온 해양박물관을 비롯해 셰르부르의 풍경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해양박물관이 멀리 바라다보이는 테라스 위에서 델핀의 친구 프랑수아즈는 처음 보는 남자에게 천연덕스럽게 추파를 던지고, 델핀은 변덕스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프랑스 남서부의 비아리츠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이 영화를 보고난 뒤였는데, 프랑스의 저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비아리츠를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르세유에서 온 HB는 코르시카(코흑스; Corse)를 강력히 추천했는데, 말이 쉽지 프랑스의 여러 지역 가운데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돌아오는 길 팡테옹의 뒷골목은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밤 열두 시가 다 되어가지만, 이곳의 만남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대책 없이 노는구나 싶으면서도 내심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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