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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의 일기: 천천히, 확실히(lentement mais sûrement)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15. 17:37
# 오늘도 거의 모든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다. 일요일에는 도서관을 비롯해 대부분의 시설이 문을 닫는데, 시험기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심지어 주말에 영업을 하지 않더라도 공간 자체는 개방을 해놓던 학교 카페테리아마저 닫혀 있었다. 학교 밖 카페에서 자릿세를 내는 식으로 공부를 하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아, 에흐네스 정원에서 공부하는 걸 택했다. 정원에서 공부를 한다는 게 내게는 아직도 너무 낯설지만, 시험이 코앞이기도 하고 급한 대로 벤치를 하나 골라 공부했던 자료들을 늘어놓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오후 반나절을 그렇게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날 정원에 있던 학생들 대부분이 하루종일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친구들과 떠들다가 클래식을 틀어놓고 책을 읽다가 다시 노트북으로 뭔가를 열심히 쓰다가, 햇빛 아래에서 하루종일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식이다. 식당 옆 조그마한 뜰에서는 아마도 연극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이는 세 명의 학생들이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지칠 줄 모르고 각본을 들고 동작을 바꿔가며 대사를 주고 받는다. 시몬 바일(Simon Weil) 강의실에서는 성가대가 제창하는 노랫소리가 복도 한켠을 가득 메운다. 학기말이 가까워질 수록 시험보다는 동아리 활동이나 축제, 운동에 더 진력을 다하는 것 같은 이곳 학생들이다.
정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머리를 식힐 겸 벤치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기분이 묘했다. 일단 학교 안에서 이렇게 누워서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싶고, 아니 그보다 살면서 하늘을 이렇게 정면으로 쳐다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학교 건물이 빚어낸 사각형 프레임 안에 푸른 하늘이 담겼다. 가까이 높다란 나무의 싱그러운 초록 잎이 보이고, 잠깐 시선을 옮기니 하늘 아주 높은 곳을 나는 새, 그리고 길게 쭉 뻗어나가는 비행운이 나타난다. 가까운 풍경 안에 갑자기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는 새의 배가 정면으로 나타났는데, 바쁜 날갯짓이 잠시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새가 날아가는 걸 항상 옆에서 봐오다가 아래에서 보니 전혀 다른 존재처럼 느껴진다.
# 저녁을 밖에서 간단히 해결하고 뤽상부르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해가 길어져서 동절기에 8시 폐관하던 공원은 이제 8시 45분이 되어 폐관한다. 공원이 문을 닫기까지 아직 시간은 있었지만, 맑았던 하늘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 같아 일기예보를 찾아보니 늦은 밤 비 예보가 있었다. 보통 오전에 흐리다가 낮에 온도가 올라가면서 화창해지는 날씨 패턴이었는데, 저녁이 되어 날씨가 흐려지는 건 오랜만인 것 같다. 기숙사에 돌아오자마자 비가 후득후득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천둥 번개가 쉼없이 방안에 들이닥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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