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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일의 일기: 나만의 세상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14. 17:36
# 점심을 먹고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데—어제부로 매우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어디서 격한 비트음악이 들려왔다. 파리는 경찰차나 구급차를 제외하면 소음이 많은 도시는 아니건만, 어마어마한 진동에 몽롱했던 정신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멀리서 울리던 진동은 기숙사 코앞에 이르렀다. 도대체 무슨 일인 건가 (잠시도 가만 두질 않는구나..) 싶어서 가방을 싸들고 밖을 나섰는데, 약간 조악한 차림새의 젊은 인파가 행렬을 이루어 보클랑 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행렬의 선두에는 디제잉을 하는 남자 두 명이 차량 위에서 흥을 돋우고 있었고, 맨 끝에는 경찰차 두어 대가 따라붙고 있었다. 행렬에는 일곱여덟 대 정도의 개인 차량까지 동원됐는데, 차량 바깥에 골판지 같을 걸 둘러서 베를린 장벽이니, 아스테릭스니, 별 희한스럽고 컨셉을 알 수 없는 장식을 해놨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늘 무슨 날인 것 같진 않아서 주변에 물어보려다가 마침 행렬 차량마다 무슨 포스터가 한가득 붙어 있는게 보였다. Point Gamma Ofenbach. 얘네는 클럽 광고를 이런 식으로 하나, 하고 나중에 학교로 돌아와서 찾아봤는데 알고 보니 5월말 해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열리는 축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파리 근교의 팔레조(Palaiseau)에 위치하고 있는, 공학분야에서는 가장 유명한 그랑제꼴이다. 얼마 전 캉(Caen)에서 돌아오는 길에 카풀을 알아보다가 팔레조로 오는 차를 발견했었는데, 파리 도심과는 꽤 거리가 돼서 포기했던 적이 있다. 그때 처음 말로만 듣던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여하간 홍보차 대학가가 모여 있는 라탕 지구까지 몸소 올라와 행렬까지 선보이고 있는 모양인데, 그 정성이 대단하다. 하늘하늘한 분홍색 중국식 의상을 입고 앞으로 걸어나가는 어떤 여학생은 양팔을 뻗은 채 몸을 좌우로 천천히 흔들며 흥에 취해 무아지경이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축제가 예정된 5월 25일이라면 고등사범학교의 상당수 학생들은 한창 시험을 치르거나 과제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인데, 이곳 학생들을 보면 한창 바쁠 때고 아니고 그리 따지지 않는 것 같다. 5월 중순부터 월말까지가 학업일정이 상당히 빡빡할 시기임에도, 간밤에 무프타흐 시장 일대를 산책하며 보니 제방이 무너진 것처럼 펍과 카페가 학생들로 미어터져서 테라스 바깥 도로까지 점령한 상태였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이곳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아시아 학생들의 성실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아시아 학생들이 노는 게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나는 실제 사람 많은 곳에서 놀 때 힘들긴 하다ㅠ) 여기처럼 놀았다가 학업을 따라갈 수 없다는 문제점이 가장 크기 때문에 성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 소동의 정체를 확인한 뒤 학교로 향했다. 에흐네스 정원을 가로질러 도서관으로 가는데, 정원 한가운데에 튜브욕조를 두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을 발견했다. 잔디밭 위에서 비키니를 입고 햇빛을 만끽하는 사람들은 여럿 봤어도, 학교의 조그만 정원에서 튜브욕조를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설마 목욕을 하는 건가 싶어 슬쩍 보니 물에 적신 모래를 정성껏 쌓아올리고 있었다. 인어를 모래성으로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남학생은 혼자 전혀 딴 세상에 와 있는 것처럼, 금발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채 조개껍데기며 모래며 세심하게 쓸어담고 쌓아올리는 데 무아지경이었다. 오늘따라 무아지경인 학생이 참 많구나.
정원에는 토요일임에도 많은 학생들이 작은 그룹을 이루어 각자 무언가를 열심히 쓰기도 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도서관에서 세 시간 조금 넘게 있다가 다시 정원을 가로질러 나오는데, 무지개색 의상을 입고 있던 한 남학생은 여전히 아까와 같은 그룹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장장 네 시간째 저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다. 지친 기색도 없어 보인다. 보통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이런 모습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 학기말이고 여러 평가가 집중되어 있는 시기에, 행사를 홍보하러 퍼레이드를 기획한다거나 봄을 맞아 모래성을 쌓아올린다거나 햇빛을 즐기며 몇 시간이고 베짱이처럼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 것들이.
어찌 보면 나도 한국에 있는 동안 남들 바쁠 때 나도 바빠야 할 것 같고, 남들이 하나둘 이루기 시작하는 시점에 나도 해내야 할 것 같아 뭐라도 찾아서 했던 것일 뿐, 그런 생각에 옥죄어 있는 동안에도 늘 딴짓은 했었다. 이곳 학생들은 그저 본인들이 딴짓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뿐, 그들 나름대로 시간을 적절히 안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들이는 노력에 비해 내 실력이 이들보다 실제 출중하다고 느끼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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