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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의 일기: 두 번의 사냥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16. 16:40
# 오늘은 시험이 두 개 있는 날이었다. 사냥감을 잡느냐 놓치느냐 하는 마음으로, 사냥감을 놓치면 사냥에 나서도 말짱 도루묵이라는 마음으로 시험에 임했다. 이날 학과 전체에서 총 2개의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나는 오늘 있었던 2개 시험을 모두 응시한 유일한 학생이 되었다. 각자 시간표가 다르긴 하겠지만, 다른 학생들은 도대체 어떤 과목들에서 학점을 인정받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첫 번째 시험인 연금정책 수업에는 6명의 학생이, 두 번째 시험인 공공재정학 수업에는 3명의 학생이 응시했다. 한 학기 동안 수업에 출석했던 학생들의 인원을 생각해볼 때 60% 정도의 학생들만이 시험에 응시한 셈이다. 일단 학기 초 수업을 고르고 확정이 되고나면 학점인정을 받을 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이곳에서는 학기 마지막 시험날까지도 본인의 학업계획을 수정한다. 우리나라의 학사 관리방식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좋은 점은 많은 학생들이 학기 중에 들어보고 싶은 수업을 다 들어가본다는 점일 것이고, 나쁜 점은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했다가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내 기준에서 퍽 질서정연해보이지 않는 느낌이 든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수업 내용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학생 구성이 수업 때마다 계속 바뀌어서 각 수업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어느 정도로 따라가야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출석은 일단 기본인데 이곳에서는 수업 출석을 전혀 통제하지 않고, 과제에 참여하는 정도와 겉으로 드러나는 실력에도 학생마다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학생의 경우 자신에게 필요한 인턴십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학기 중간에 2주를 할애해서라도 그 기간 동안의 수업을 제끼고 원하는 인턴십에 참여한다. 한국에서라면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 연금정책 시험은 쉽기도 했고 어렵기도 했다. 초반부 문제는 문제를 푸는 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못해서 이렇게 풀면 큰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후반부 문제에서 크게 막혔다. 이번 프랑스 대선 과정에서 연금수령이 가능한 연령을 늦추는 게 이슈가 되었었는데, 그래서인지 이와 관련된 주제가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나왔다. 주요 개념들을 빠뜨리지 않고 넓게 공부했던 것과 다르게 연금수령 시기와 관련해서만 열두 문제 중 세 꼭지가 나왔다. 수업중에 소화한 대주제가 여섯 개고 연금수령시기는 그 안에서도 소주제였던 점을 생각하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 구성이었다. 시험이 끝난 뒤에 왜 이렇게 연금수령 시기 조정에 관한 문제가 많이 나왔던 걸까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불과 한 달 전 대선이 있었다는 게 아차하고 떠올렀다. 앞선 열 문제를 잘 풀었음에도 점수 비중이 높은 뒤의 두 문제에 답안을 충분히 적어내지 못해 걱정이 되는 상황.
공부 내용 자체는 더 난이도가 있었던 공공재정학의 경우 오히려 시험은 힘들지 않았다. 물론 2시간 40분에 이르는 시험시간이기는 했지만, 수업자료를 참고하면서 답안을 작성할 수 있고 필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머릿속에 얼추 정리를 해놓은 상태였다. AD 교수는 늘 하던 대로 학자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답안을 적어내라며 학생들에게 격려해주었다. 두 개의 시험을 마치고 나니 녹초가 되어서 저녁을 먹어야 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 줄곧 한국에서 공부했던 나는 미친듯이 글을 써내려가는 방식의 시험에 익숙한데, 이곳의 지필시험은 그 정도로 격앙된(?) 분위기는 아니다. 상당히 천천히 글을 써내려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일단은 무작정 긴 글을 써서 이것저것 다 키워드들을 다 주워담는 게 아니라 꼭 필요한 내용들만 고르는 것 같기도 하고. 시험이 끝나면 답안을 몇 장 썼는지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걸 들어오며 살았던 나로서는 하여간 도대체 적응하기가 어려운 신기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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