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7일의 일기: 목적도 없이(vers Provins)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17. 21:50
# 오전에는 행정업무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신청해 둔 사회보장 절차가 중간에 막혀서, 반려된 서류(수학증명서)와 관련해 학교 이곳저곳에 문의를 했다. 기숙사비를 내러 찾아간 사무실에서 A는 여기(프랑스) 행정절차가 이래서야 정말 큰 일이라고 본인도 심각한 얼굴을 하고, 도움을 구할 수 있을 만한 곳을 발벗고 알려주었다. A의 이름은 그의 고향이 아랍 세계의 어딘가라는 걸 알려주지만, 그런 구분과 별개로 항상 그의 깊은 호의에 도움을 많이 얻었다. 어쨌거나 결국은 국제처로 향했고 국제처 직원 또한 관련된 정보를 최대한 구해주었지만, 결론은 사회보장을 소관하고 있는 행정당국과 풀어야 할 문제였다.다만 서류상에는 전혀 하자가 없는데도 신청이 반려되었기에, 아무래도 단기 체류자이면서 신청 시기가 늦어졌으므로 이제 와 사회보장 신청을 수리할 까닭이 없다고 행정당국에서 판단한 게 아닐까 서로 추측할 뿐이었다. 프랑스인이 아닌 국제처 직원 또한 프랑스에 도착해 사회보장을 최종적으로 받기까지 6개월이 걸렸다고도 했고.. 신청이 늦어진 것 역시 사회보장 신청에 필요한 은행계좌 개설이 3개월 가량 걸리면서 생긴 문제였지만 이러나저러나 더는 수렁에 끌려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 오후에는 잠시 프로방(Provins)이라는 일드 프랑스의 소도시에 다녀왔다. 사실 사회보장 업무를 담당하는 CPAM 사무실을 내방할 수도 있었지만, 지난 수 개월 간의 경험으로 미뤄볼 때 방문하고 나면 더 답답한 일이 생긴다는 걸 알기에 더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판단, 머리를 식힐 겸 반나절 일정을 예상하고 근교로 나섰다. 프로방은 나비고 카드만 있으면 파리 동역에서 P노선을 타고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즉 별도의 이동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 5월달 나비고 카드의 본전은 어디서 뽑나~(?) 생각하면서 원래는 베르사이유나 퐁텐블로를 더 가고 싶었지만, 화요일마다 퐁텐블로 성은 문을 닫고 베르사이유 성은 사람이 가장 붐빈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이 많은 곳은 무슨 일이 있어도 멀리하고 싶었고 결국 프로방을 다녀오기로 했다. 프로방은 행정구역상 일드프랑스에 속하지만 셩파뉴 지방과 맞닿아 있는 지역으로, 나비고 카드로 이동할 수 있는 가장 먼 도시 중 한 곳이라 하겠다. 또한 2001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중세 도시로, 프랑스 남서부의 카르카손과 여러모로 비슷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평일 낮 소도시는 무척 평화롭고, 수업에서 귀가하는 중고등학생들의 장난스런 대화가 이따금 정적을 깼다. 오늘도 무계획으로 온 나는 P노선 열차 안에서 여념 없이 곯아 떨어졌다. 역에 도착한 후에서야 도시의 어디를 어떻게 둘러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카이사르 탑(Tour César)으로 가장 먼저 향했다. 혹시 몰라 역앞 관광안내소를 먼저 들렀지만 어찌 된 일인지 영업시간이라 적혀 있었는데도 문이 잠겨 있었다. (여기선 너무나 흔한 일..심호흡=_=) 조금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프로방에서 둘러볼 만한 곳들도 한눈에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일단은 카이사르 탑으로 갔다.
카이사르 탑은 프로방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옛 통치자들이 거처하던 공간이기도 하다. 이 위치에 통치공간이 들어선 건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지금의 탑이 지어진 건 앙리 1세의 주도 하 12세기 때의 일이다. 탑에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고 프로방이라는 지역 자체가 로마의 카이사르에 의해 처음 지어졌다는 설화도 있지만, 실제 카이사르가 프로방에 온 적이 있는지에 관해 역사적 증거는 없다는 다소 허무한 이야기. 햇살이 가장 따듯할 3~4시쯤 도착해서 탑의 정상에 올랐을 때에는 프로방 시내의 풍경이 아주 선명하게 들어왔다. 프로방에 커다란 성벽 잔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높은 곳에 올라서 봐도 성벽이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한편 탑을 나서며 직원에게 물어보니 올해 중세 축제는 6월 25일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프로방에서는 해마다 중세 축제(la fête médiévale)가 열리는데 이때 중세를 컨셉으로 다양한 행사들이 준비된다. 어차피 날짜를 골라 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만 궁금하기도 하고 좀전에 관광안내소를 들르지 못한 상태라 일단은 조각조각 정보들을 확인해 두었다.
# 프로방의 서쪽 바깥으로 좀 더 나가면 성벽 잔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카르카손에서 봤던 성벽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은데, 바로 옆으로는 푸른 밭이 시원하게 뻗어 있어서 천천히 산책을 하기에 좋다. 언젠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영화에서 꼭 이런 풍경을 봤던 것 같다. 따듯한 햇살이 깊은 침묵과 아련함으로 차차 바뀌어가는 풍경들. 나는 성벽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한 바퀴를 돈 다음 시내를 가로질러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 날씨만 조금 선선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다.
역에서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왔다는 싱가폴 부부를 만났다. 아마도 내가 역무원에게 열차 시각을 확인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는지, 열차를 타는 위치와 시간에 대해 물어왔다. 혹시 영어를 할 줄 아냐며.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를 비켜 주었는데, 파리에 도착한 뒤에 다시 이들 부부를 마주쳤다. 이번에는 파리 동역도 아닌 오데옹 일대에서 마주쳤다. 아마도 숙소를 라탕 지구에 구했는지 파리 동역에서 내린 뒤 나랑 같은 4호선을 타고 오데옹까지 온 모양이었다. 누가 멀리서 내게 큰 소리로 아는 체를 하길래 누군가 싶었다. 좀 아까 만났던 싱가폴 남자가 오늘 고마웠다고 한 블록 거리에서 내게 크게 팔을 흔들어 보였다. 가끔 통성명에도 이르지 못한 낯선 얼굴들을 길 위에서 만나게 되고, 언젠가는 얼굴과 목소리마저 지워지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끝까지 기억에 남을 것이다.
'Vᵉ arrondissement de Paris > Mai'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월 19일의 일기: 일단 멈춤(Rappel) (0) 2022.05.20 5월 18일의 일기: 라파예트(Lafayette) (0) 2022.05.18 5월 16일의 일기: 두 번의 사냥 (0) 2022.05.16 5월 15일의 일기: 천천히, 확실히(lentement mais sûrement) (0) 2022.05.15 5월 14일의 일기: 나만의 세상 (0) 2022.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