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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의 일기: 주인공(主人公)과 조연(助演)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12. 17:19
# 오늘은 HB의 마지막 수업이 있었다. “결산하기(Faire le bilan)”라 해서 한 학기 (또는 학생에 따라서는 한 해) 동안 프랑스에서 겪었던 어려움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원래 예정된 문화인류학 수업을 (지정된 논문에 대한) 페이퍼 제출로 대체하고 싶다고 미리 의사를 밝히고, (페이퍼를 제출한 다음) HB의 수업을 연달아 두 개를 들었다. ECLA에서 열렸던 수업들은 이번 학기 내게 작은 안식처가 되었던 곳이다. 기본적으로 ECLA에서 열리는 프랑스어 수업은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개방적인 성격이 강하고, 서로 비슷한 고충을 안고 있는 외국인들끼리의 정보 공유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충 공유(?)도 수월하다.
# 별의 별 얘기가 다 나온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 온 학생은 프랑스에 있는 이탈리아 음식점들은 왜 피자만 파는지 모르겠다고도 했고, 발음체계가 너무 달라서 힘들었다고도 했다. 중국에서 온 학생은 이곳의 평가체계가 이십진법에 기초해 있는 점이나, 상당히 자유로운 수업 구성에 놀랐다고 했다. 이란에서 온 친구는 공공기관에 서류를 제출하는 힘들다고 했다. 파리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는 내가 했는데, HB는 그게 사실 외국인들만 느끼는 문제는 아니라고 재밌는 말할 거리가 있다는 듯 이야기했다.
HB는 파리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어려운 까닭을 크게 두 가지로 꼽았다. 첫째, 파리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 자체가 음절을 줄여서 말하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더 알아듣기 어렵다. 예를 들어 ‘창문(Fenêtre)’을 발음할 때, 다른 지역에서는 세 음절로 발음하지만 파리에서는 ‘fenê’를 한 음절로 발음한다. 둘째, 프랑스의 가장 큰 도시이고 각자의 일에 바쁘다보니 다른 사람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새로운 사람에 대해 무감각(blasé)하기도 하고, 모든 중요한 이슈가 발생하는 정치적, 문화적 현장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우월감도 상당히 높다. 마르세유에서 온 HB도 처음 파리로 상경해서 공부를 할 때 충격적인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우편을 보내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는데, 서류 상단 지역을 기입하는 란이 파리(Paris)와 나머지 지역(Reste du monde)으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 시험기간의 특성상 뭔가 머릿속으로 뭘 더 공부해야 할지 떠올릴 수록, 더 딴짓할 거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오늘은 내일 있을 발표 준비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도 혼자 중얼중얼거리며 반 넋 나간 사람처럼 발표내용을 반복했다. 참 영어가 뭐라고 사람을 극도의 긴장상태로 몰아넣는데, 중얼대던 나를 발견하고 흠칫하기도 몇 번. 초탈한 상태에서 다음날 발표를 준비하는 동안, 내가 내게 주어진 상황 안에서 너무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사실 살다보면 내가 주인공일 수 없는 날이 그런 날보다 수두룩하거늘, 늘 조연이 될까 전전긍긍하면서 나를 더욱 더 불편한 상황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먼 곳에 와서 나 자신을 맞닥뜨리다보면 조금 다른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될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떠나왔던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내가 조연이 될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 의식이 내 안 깊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졌다. 영화에서처럼 현실에도 주연과 조연이 있을 순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주연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식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조연 없는 주연은 이야기 속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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