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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일의 일기: 말말말(言)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10. 18:26
# 이곳에 온 뒤로 내가 완고한 사람이란 걸 깨닫는 순간들이 많다. 평소 나 자신이 다양한 삶의 방식과 새로운 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해 왔음에도 이곳에 좀처럼 녹아들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고서 놀랄 때가 많다. 그럼에도 그 높던 장벽이 많이 낮아진 편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여전히 인사를 나누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여전히 나라는 사람의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두려는 노력이 섞여든다.
# 이곳에는 다양한 학생들이 있듯이 참 다양한 종류의 억양이 존재한다. 이곳에서 내가 주로 쓰는 언어는 영어와 프랑스어인데, 먼저 영어의 경우 내가 들어서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경우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 중 독일, 북유럽에서 온 친구들이 영어를 쓸 때인 것 같다. 특히 북유럽 사람들은 영어를 왜 잘하는지 는 모르겠지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내가 얼핏 들어도 굉장히 유창하게 한다. 어쩌다 종종 마주치는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의 영어도 들어서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데, 정작 프랑스인이 영어를 쓰는 경우 듣다가 현기증이 들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 가장 큰 요인은 프랑스어의 기본 억양 때문인 것 같다. 프랑스어 특유의 악센트와 비음이 섞이는 순간 같은 영어 단어라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둔갑되는데, 여기에 영어랑 사실상 형태가 똑같은 어휘를 프랑스식으로 발음하는 경우—예를 들면 maintain(메인테인)을 ‘망탕’으로 발음한다든가—귀를 쫑긋 세워도 놓치는 말들이 생긴다.
한편 프랑스어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영국이나 이탈리아에서 온 학생들의 프랑스어를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느꼈던 편이다. 그러고 보면 영어와 프랑스어는 굉장히 닮은 듯 이질적인 언어인 것 같다. 여하간 영국인의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인의 프랑스어를 알아듣기 힘든 까닭은 두말할 것도 없이 ‘r’ 발음의 차이 때문인 게 가장 큰 것 같다. 세 나라의 r 발음은 상당히 다른데, 프랑스어의 r 발음은 목젖을 긁는 독일어의 r 발음과 가장 가깝다. 어쨌든 상대는 유창하게 프랑스어로 얘기하고 프랑스인들도 이해를 하는데—이게 또 프랑스인에게는 상대가 혀 끝으로 r을 발음하든 입천장에 갖다 대서 발음하든 그들이 쓰는 r처럼 찰떡 같이 알아듣는 모양이다—나만 조용히 숨죽이며 바라보는 경우가 생긴다. (나한테는 알파벳만 r이지 전혀 다른 세 개의 발음이다)오히려 포르투갈어를 모국어로 두고 있는 학생들의 프랑스어는 이해하기가 수월했던 편이다. 포르투갈어가 로망스어의 한 갈래이기도 하고 포어의 ão 발음이 프랑스어의 비음과 꽤 흡사하다.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는 학생들과는 아쉽게도 얘기할 기회 자체를 가져본 경험이 거의 없다. 내가 속한 학교에는 남미 지역—칠레와 브라질 학생을 본 적이 있다—에서 온 학생들은 있어도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학생들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프랑스와 이베리아 국가들이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늘 의외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언어적인 면에서도 내가 알게 모르게 장벽을 두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는데, 특히 영국사람과 독일사람이 서로 신나게 프랑스어로 얘기하는 걸 보고 있었을 때가 그랬다. 둘 다 가족 중 프랑스어 화자가 있어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에 자신감이 있다 해도, 어쨌든간 이 둘이 내 귀를 기준으로 ’완벽하지 않은’ 프랑스어로도 유쾌하게 대화하는 걸 보면서, 언어라는 게 ‘정석’으로 말하고 아니고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텐데 나를 어떤 울타리 안에 욱여넣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보니 아직도 무너진 바벨탑 주위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 요새 (비로소 4개월이 다 되어서야) 이곳 학생들처럼 도서관이 아닌 교정 벤치에 앉아 공부를 시도해보고 있는데, 왜 여기 학생들이 공부를 야외에서 하는지 조금 이해가 될 것 같다. 공부해야 할 건 많고 계속 도서관에 있다보면 갑갑할 때가 있는데, 야외에 나와 공부를 해보니 밖에서 공부한다고 해서 꼭 주의가 분산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학생들 떠드는 소리가 백색소음이 되어서 집중도 잘 되는 것 같다. 공부할 거리들을 미루지 않고 있건만, 문제라면 체력, 또 체력이다.'Vᵉ arrondissement de Paris > Mai'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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