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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의 일기: 홀리(Holi)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22. 17:13
# 늦은 오후에는 불로뉴 숲 일대의 아클라마시옹 공원(Jardin d’acclamation)에 다녀왔다. 시험을 앞두고 해야 할 공부도 많고, 불로뉴 숲까지는 길도 멀어서 내키지 않았지만 며칠 전부터 N이 바람 쐬러 나가자고 연일 낚시질을 하던 터였다. 일요일이고 하루 종일 공부할 것도 아니다보니 바람도 쐴 겸 샹젤리제 거리나 좀 걷자고 했던 게, 아클라마시옹 공원에 가는 일정으로 불어나게 된 건, N이 이날 열리는 인도 축제 정보를 알고난 뒤의 일이었다. 나는 급작스런 일정 변경에 하던 작업만 마저 마친 뒤 3시 반에 약속장소에서 보자고 했다. 막상 1호선을 타고 역에 내리니 피로감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와서 이거 공원이나 잘 둘러보겠나 싶었다.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했는데 늦은 오후가 되어도 여전히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물론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 막상 만나고 보니 또 기운이 나서 힘든 줄 모르고 공원을 돌아다녔다. 공원 일대의 놀이기구에는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대부분이고, 콘서트와 축제 현장을 찾으러 온 우리는 공원 한가운데 호수로 향했다. 호수에 가까워질 수록 굴랄(আবীর)이라 알려진 색색의 파우더 가루가 묻은 인파가 보이기 시작했다. 콘서트 무대 위에 인도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음악의 바운스가 생각보다 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연의 분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서로 모르는 사람에게 굴랄을 뿌리며 축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이 굴랄도 조그만한 게 한 봉지에 2유로를 하는지라, N과 나는 빨간 색 한 봉지만 사고 잔디밭에 뒹구는 굴랄 봉지들을 모아 남은 굴랄을 뿌리며 시간을 보냈다. 파리든 서울이든 사실 나는 이렇게 북적이는 분위기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편이라 사진을 남기며 시간을 보냈고, N은 참 열심히도 굴랄을 뿌리고 모르는 사람들과 사진을 남기며 다닌다. 평소에는 그렇게 도도해 보이던 파리 사람들도 이곳에서만큼은 허물을 벗어던지고 무장해제된 느낌이었다. 원체 먼저 말 거는 법이 없는 이곳 사람들도 서로 즐겁게 인삿말을 건네거나 먼저 사진 좀 찍어달라고 요청한다.
# 콘서트장을 조금 벗어나면 인도식 요리를 비롯해, 푸드트럭과 부스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N은 점심을 안 먹은지라 뭐라도 먹어야겠다더니, 대뜸 요가 부스로 향했다. 얼떨결에 나도 생전 처음 요가를 해보았다. (살면서 요가를 해본 적이 있기는 있었던가 모르겠다) 간단히 서로 소개를 한 다음 인솔자가 요가와 관련된 여러 용어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순수한 지혜, 욕망의 흐름 등등 동아시아에서 온 나조차 익숙치 않은 영적인 것에 대해 술술 이야기한다. 그리고 본격 명상 모드에 들어갔는데 사실 나는 집중을 못했다. 돗자리에 앉은 N과 Y와 달리 나는 별 생각 없이 풀밭에 털썩 앉았는데, 눈 감고 명상을 하다보니 뜬금 없이 바지에 풀물이 들까 걱정이 되었다. 좀전까지 비가 오기도 했었고. 이 상황에서도 세속적인 것들을 떠올리는 나는 전형적인 동아시아 사람인 모양이다.
명상을 마친 다음 서로 소감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딴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할 말이 그리 많지 않았다. 반면 N과 Y는 짧은 시간 사이에 효험을 느꼈다고 이야기한다. 가부좌 자세나 양반 다리를 트는 게 그리 새로울 것이 없던 내 입장에서는, 요가 명상에서 큰 경험을 한 듯 이야기를 나누는 N과 Y가 더 신기했다. 한편 Y는 알고보니 공원에서 근무하는 요원이었는데 잠시 휴식할 겸 명상하러 왔다고 했다. 다음 주에는 캐나다 몬트리올로 출국하는데, 그곳 사투리에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기대가 되는지 내내 밝은 표정이었다. N과 나는 원래 계획으로 돌아와 크레페를 하나씩 사들고, 다시 Y가 일하는 호수 보트 선착장으로 가서 건강히 캐나다에 다녀오라고 인사하고 돌아나왔다. 호수는 공원 내 서울 정원(Jardin Séoul)과 맞닿아 있었는데, 호수 위 정자가 우리나라의 여느 공원들과 판박이어서 보면 볼 수록 신기했다.
# 끝으로 공원 동측 입구에서 열리고 있던 간이 무대를 관람하는 것으로 이날의 구경을 마쳤다. 인도의 전통악기와 노래를 부르는 공연이었다. 공원이 문닫을 시간이 가까워지자 앵콜곡을 앞두고 주프랑스 인도 대사관을 비롯해 이번 행사를 주최해준 관계당국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렸다. 프랑스 행정당국이 일하는 걸 보면 사실 이런 행사를 어떻게 열까 싶기도 한데, 전반적인 소감은 구성이 잘 짜여진 축제였다는 점이다. 홀리 축제처럼 생각 없이 즐길 거리도 있었지만, 요가 부스, 인도 요리 부스 등등 인도라는 나라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잘 마련되어 있었다. 불로뉴 숲 옆 아클라마시옹 공원의 부지가 꽤 크기 때문에, 이 넓은 공간을 활용해 축제를 개최하려면 기획 단계에서부터 상당히 많은 준비가 필요했을 것 같다. 파리에 체류중인 수많은 인도인들에게는 자국의 문화를 모처럼 즐기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와 기숙사에서 샤워를 하며 코를 푸는데 검은 콧물이 나오는 걸로 보니 굴랄 성분이 문제가 없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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