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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의 일기: 참을 인(忍) 세 번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24. 05:00
# 얼마전 파리에 체류중인 한국 학생들이 주택보조금 얘기하는 걸 듣고, 차마 다시 열어보고 싶지 않았던 사회보장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생각에 빠졌다. 파리에 도착한 날짜보다 출발할 날짜가 더 가까워진 지금 사회보장이 반드시 필요하진 않은데, 그 동안 들인 시간이 허송세월로 묻히는 게 싫어 절차를 끌고가는 상황이었다. 내 경우는 꽤나 복잡했다. 일단 소시에테 제네랄에서 은행 계좌를 트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게 결정적이었다. 때문에 덩달아 사회보장 신청이 크게 늦어졌다. 사회보장을 신청하려면 일단 은행계좌정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와 누굴 탓하겠냐마는 첫 단추를 소시에테 제네랄로 꿴 건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BNP 파리바나 소시에테 제네랄처럼 프랑스에서 가장 큰 은행을 가면 장땡이겠지, 하는 순진한 생각으로 마침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소시에테 제네랄을 갔었더랬다.
하지만 나 또한 학기 초 학업 제반에 필요한 온갖 업무들을 처리하느라 첫 약속 이후 은행 업무를 꼼꼼히 돌볼 겨를이 없었고, 소시에테 제네랄 측에서도 여러 이유를 들어 업무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아 RIB(은행계좌증명서)을 받고 체크카드를 활성화하기까지 2개월 조금 넘게 걸렸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행정상 오류도 오류지만 절차 하나에 소요되는 시간이 굉장히 길었다. 중간에 바캉스 기간이 끼기라도 하면 2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증발해버렸으니.. 나중에 S나 N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LCL 같은 시중 은행은 소시에테 제네랄만큼 규모 있는 은행이 아니긴 해도 당일에 계좌를 열어줄 정도로 절차가 간단하다고 했다. 애당초 여신 업무를 볼 것도 아니고 나처럼 반 년 정도 체류하는 학생에게는 LCL 같은 은행이 딱 적합했던 것이다.
결국 사회보장 신청을 한 건 내가 이곳 파리에 도착하고 딱 3개월이 되던 시점이었으니, 이미 파리에서 예정된 체류 기간을 절반 넘긴 시점에서 프랑스 행정당국에서 신청된 사회보장을 수리하지 않겠다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이 역시 어디까지나 추측이기는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왈가왈부해봐야 내 손해라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내 딴에는 그간 이곳의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행정업무에 대해 답답함이 올라오면서 분통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던 게 사실이다. 신청된 서류가 반려되었다고 하면 적어도 왜 반려되었는지 안내를 하거나, 그게 아니면 문의전화 연결이라도 수월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보니 무력하게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어쨌거나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고 6구에 있는 PSL(Paris Sciences & Lettres)의 국제처에 들러보기로 했다. 얼마전 HB가 내 사정을 듣고 알려준 곳이다. 그녀가 우스갯소리로 프랑스 행정이 너무 복잡하다보니 이곳에 온 외국학생들 중에 학기가 끝날 때까지도 의무적으로 밟아야 하는 절차들—즉 사회보장제도 가입—을 처리하지 못한 채 귀국하는 학생들이 심심찮게 있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그녀는 PSL의 안내체계가 상당히 잘 되어 있는 편이라고 소개하며, 사회보장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전혀 갈피를 못잡고 있는 상태라면 한 번 가볼 것을 권했다.
항상 교내 국제처만 이용하고 있었는데, 상위 개념의 대학연합체인 PSL에서도 국제처를 운영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실로 프랑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알음알음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성격의 기관—그게 고등교육기관이든, 연구소든, 아니면 다른 형태의 법인이든—이 느슨하게 때로는 단단하게 연계되어 있어서, 어떤 일을 조율할 때마다 적절한 컨택포인트를 찾는 게 아주 중요하다. 나도 내가 공부하고 있는 곳이 PSL 산하에 소속되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내게는 ‘대학연합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생소하고 모호했기 때문에 학기말이 되어서야 PSL에서 별도로 운영중인 국제처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피스아워(Office hour)에 맞춰 PSL의 국제처에 갔을 때 직원들은 모두 부재중이었다. 입구를 지키는 직원은 오늘 모든 직원들이 회의로 인해 하루종일 현장에 부재중이라고 했다. 이럴 거라면 오피스아워는 왜 정해두는지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 대외적으로 본인들이 안내한 게 있으면 적어도 지키는 시늉은 할 수 없는 걸까. HB는 내게 농담조로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행정업무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만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는데, 그 자리에서 울라는 말이었다. 그녀는 한 번 웃자고 본인의 경험담을 곁들여 한 말이지만 나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고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뒷목이 당겼던 경험은 셀 수 없이 많아서 건성으로라도 웃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의 체류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이 모든 기괴스런 단계와 복잡한 절차들, 도대체 이건 무얼 위해 존재하는 걸까. 또 다시 분을 가라앉히고 5구의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것 말고 내가 별 수 있으랴. 이건 요령도 통하지 않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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