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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의 일기: 쿨레 베르트(Coulée verte)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25. 23:20
# 마지막 시험도 끝이 났다. 아직 페이퍼 과제가 하나 남아 있기 때문에 학기 일정이 모두 마무리된 건 아니지만, 촌각을 다투면서 해야 하는 공부는 이로써 끝이 났다. 시험은 총 다섯 개의 문제—게임이론, 협상 네트워크, ESS(Evolutionary Stable Strategy)—가 출제되었고, 막히는 문제 없이 내 기준에 만족스럽게 답안을 적었다. 남은 건 채점자의 몫이다. 이제 정말 끝이 났구나 하는 안도감, 그리고 약간의 성취감이 느껴진다. 사소하게나마 성취감을 느껴보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게 끝이 났구나, 못할 거라 생각했던 걸 해냈구나, 하는.
반 년에 불과하지만 꽤나 나이를 먹고 늦은 나이에 처음 외국생활을 하며 학업생활을 한다는 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도전적인 일이었다. 그걸 도착하고나서야 깨달았다. 그 전까지는 해외에서의 공부는 늘 머릿속에 맴돌던 환상이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해외 생활에도 최적화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파리에서의 학업 생활은 군대 생활이나 회사 생활과는 다른 차원의 노력을 필요로 했다. 즐거운 일이든 궂은 일이든 온갖 자극의 수용체가 되자고 마음 먹었건만, 내가 길들어져 있는 알을 깨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언어로 말을 하고 생각하고 공부하는 건 실로 커다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결과가 모든 걸 미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기 내내 전전긍긍했던 공부들도 하나둘 무탈히 마무리가 되어 가는 게 가시적으로 보이면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약간의 성취감이 드는 것이고, 그보다 더 작기는 하지만 약간의 허무함도 끼어든다. 오늘 쿨레 베르트를 걸으면서 내가 이 곳에서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에 대해 머릿속으로 갈무리가 되었다.
# 이제 교실을 찾을 일도 더는 없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6구의 파리 대학을 나선 다음 이제 뭘하지 하다가 바스티유로 향했다. 원래는 페흐 라셰즈를 한 번 더 들르려 했는데 같은 방면에 있는 쿨레 베르트(Coulée verte)를 걸어보기로 했다. 쿨레 베르트는 도메닐 대로(Av. Daumesnil)가 리옹 가(R de Lyon)로부터 갈라지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처음에는 주변을 둘러봐도 녹지가 보이지 않아서 두리번거렸는데, 사람들이 향하는 대로 건물 위로 올라갔더니 말 그대로 오솔길(Coulée)의 시작점이 나타났다. 쿨레 베르트의 또 다른 명칭은 프로므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ée)다.
지상 구간이 시작되는 픽퓌스 지역(Picpus)을 기준으로 쿨레 베르트의 시작점에 이르는 약 2.2km 길이의 오솔길은 건물 옥외에 조성되어 있다. 옛 철교다. 폐선된 철교는 1969년 공원 내 녹지로 탈바꿈했다. 이렇게 해서 공중에 뻗은 오솔길은 지상으로 내려온 뒤에도 지상과 공중 구간을 오가며 방센느 숲까지 한참 더 이어진다. 구간구간마다 길의 형태와 조경이 달라지고 난간 너머로 보이는 길의 풍경도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또한 오솔길 아래로는 동글동글한 철교 아치마다 ‘Le viaduc des arts’라는 이름 아래 각양각색의 스튜디오가 들어서 있다.
12구를 동서로 관통하는 이 길에는 르네 뒤몽(René Dumont)이라는 인물명이 따라붙는데, 독특하게도 쿨레 베르트를 처음 설계한 건축가의 이름이 아니라 1974년 프랑스의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생태주의를 제창한 대선 후보 르네 뒤몽의 이름을 따왔다. 도심 속에 이렇게 큰 녹지가 조성되어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렇게 길다란 오솔길이 폐선된 철교 위에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걷는 일 자체가 독특한 체험이 된다. 적어도 2층 되는 높이의 건물 옥상에서 가까이에는 나무가 있고 저 아래로는 도로를 달리는 차가 보인다.
나는 회이 공원(Jardin du Reuilly)을 지나 비발디 가의 한 벤치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파리에 와서 처음으로 느끼는 깊은 안정감이다. 처음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두 다리가 땅에 닿아 있는 느낌이다. 내가 이곳에 온 뒤로 꽤나 긴장 상태로 지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안전하다는 그 기분을 계속 느끼려고 벤치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픽퓌스로 빠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방면으로 나갈까 하다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빼앗겨 그 길로 방센느 숲까지 쭉 걸었다. 나는 포흐트 도레(Porte Dorée)를 통해 방센느 숲에 도착했다.
방센느 성은 가본 적이 있지만, 방센느 숲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다. 숲에는 지금 ‘La Foire du Trône’이라는 간이 놀이공원이 열리고 있다. 간이 놀이공원이라고는 하지만 규모가 꽤 크다. 호기심에 입장해봤는데, 분위기가 상당히 묘했다. 이곳사람들이 워낙 놀이기구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보니 도심 속에서 이런저런 놀이기구들을 볼 일도 있었는데, 방센느 숲 안에 있는 놀이공원은 쇠락한 도시에 설치된 반 세기 전 놀이기구들 같았다. 일본의 파칭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무선마이크를 들고 놀이기구에 올라탄 사람들의 흥을 띄우는 직원들의 모습은 아날로그적이다 못해 너무 구식이라 그 나름대로 신기하다.
방센느 숲을 나온 뒤에도 더 걷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향한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발미 육교(La passerelle de Valmy)다.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파리 바깥, 방리유(banlieue)다. 발미 육교를 간 이유는 그냥 영화 속 풍경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발미 육교는 <쥴 앤 짐(Jules et Jim)>이 촬영된 곳이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쥴 앤 짐>에서 주인공들이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철교 위를 달리는 장면을 알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진게 1962년의 일이다보니, 육교는 그 이후 새로 지어졌다고 해도 될 만큼 크게 개보수가 이뤄져 지금은 영화 속 풍경을 사실상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점은 오기 전에 알고 있었지만, 오늘 따라 걷는 일이 괜찮아서 발미 육교까지 나가보았다.
발미 육교 아래로는 리옹 역에서 발착하는 시외 열차 노선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저 멀리로는 몇 주 전 탐방했던 장 누벨(Jean Nouvel)의 듀오 타워와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의 미테랑 도서관이 보인다. 철교는 상당히 긴데 이 길 위로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벨바그 영화가 촬영된 곳이라는 건 이제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 듯 도시 한가운데 적막감이 흐른다. 밤이 가까워져 올 수록 하늘에 구름이 늘어났다. 육교 위 바람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고, 나는 24번 버스를 타고 다시 팡테옹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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