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21일의 일기: 분실물 습득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21. 20:15
# 오전에 일찍 일어나 움직이기는 했는데 영 몸이 찌뿌둥하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정신을 차린 다음 잠시 기숙사에 들르려고 보니 주머니에 학생증이 잡히지 않았다. 학생증을 깜박하기도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기숙사를 출입하는 사생 덕에 들어오기는 들어왔는데, 문제는 방에 돌아와 방안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학생증이 보이지 않았다. 전날 센 강에서 N과 헤어진 뒤 기숙사를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학생증을 잘 썼으니까 어디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전날 늦은 밤 소르본 대학 앞에서 <살인의 추억>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기숙사에 들어가려다가 학생증이 보이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기숙사로 돌아온 시간상 자정이 넘어서 학생증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잠들었었다. 그러고서 전날의 기억은 온데간데도 없이 오늘 아침 그냥 기숙사를 나섰다가, 전날 밤부터 학생증이 보이지 않았던 게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나는 일단 지난 밤 방에 학생증을 두고 외출한 걸로 확신하고 계속 기숙사 방을 구석구석 뒤졌다.
해야 할 공부가 산적해 있어서 학생증만 찾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후 내내 보안담당자나 사서들에게 구두로 양해를 구해가면서 학교와 도서관을 출입했다. 그렇게 오후를 학교에서 무탈히 보내기는 했는데 아무리 봐도 학생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으니. 자포자기 상태로 평일이 되면 행정실을 찾아 새로운 학생증을 발급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서 저녁을 먹고 기숙사에서 쉬다가 불현듯 든 생각이 혹시 어제 영화관에서 분실한 건가..? 하는 것이었다. 주머니가 얕은 옷을 입진 않았는데 영 운이 나쁘면 카드를 흘리고 왔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별 기대 없이 소화도 시킬 겸 어제 찾았던 라 필모테크 뒤 캬흐티에 라탕을 찾았다.
늘 매표소를 지키고 있는 젊은 직원이, 오늘의 마지막 상영작을 틀어놓고 입구 계단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앉아 있는 시각이었다. 끽연 중에 미안하기는 했지만, 어젯밤 여기에 왔다가 학생증을 분실한 것 같은데 확인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젊은이는 이제 갓 불이 붙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부스로 들어가 곧장 하양과 파랑이 섞인 학생증을 들고 나온다. 꼭 내 이름을 밝히지 않더라도 보관하고 있는 분실물이 있냐고 한밤중에 물으러 온 동양인과 어젯밤 오드리 햅번 상영관에서 발견된 학생증 사진 속 동양인이 다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는 자세한 질문도 하지 않고 학생증을 곧장 내게 건넸고, 큰 기대 없이 왔던 나는 뜻밖의 수확에 그에게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De rien이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그 청년도 곧장 물건을 집어오는 걸 보면 내심 학생증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소르본 대학 앞을 빠져나온 나는, 학생증이 하자가 없는지 테스트라도 해보겠다는 듯 한밤중 학교 교정으로 들어갔다. 에흐메스 정원에는 주말 밤 여흥을 쏟아내는 학생들 무리가 군데군데 마실 것과 함께 모임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인적이 없는 B구역 쪽 벤치에 앉아 들뜬 기운의 밤공기를 마시면서 부족한 공부를 좀 더 해보려 했다. 하지만 잠들기 전 머리는 그리 맑지 않았고 잠시 자료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이제 이번 학기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내게 필요한 건 단 하나 유종의 미밖에는 없다.
'Vᵉ arrondissement de Paris > Mai'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월 23일의 일기: 참을 인(忍) 세 번 (0) 2022.05.24 5월 22일의 일기: 홀리(Holi) (0) 2022.05.22 5월 20일의 일기: 현실 속 풍경, 풍경 속 현실(au bord de la Seine) (0) 2022.05.20 5월 19일의 일기: 일단 멈춤(Rappel) (0) 2022.05.20 5월 18일의 일기: 라파예트(Lafayette) (0) 2022.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