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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의 일기: 현실 속 풍경, 풍경 속 현실(au bord de la Seine)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20. 17:16
# 처음으로 성적이 발표된 과목이 나왔다. 사실은 요새 한국 귀국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교수에게 학점 확인을 미리 할 수 있을지 개인적으로 미리 문의를 해 놓은 과목이었다. 이곳에서 필요한 절차는 미리 밟기 시작해도 시간이 워낙 오래 걸리고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서두를 필요도 있었다. (서둘러도 아무 의미 없을 때가 많지만 일단 시도 자체는 해봐야 하니..) 어쨌든 연금정책은 13/20점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행여 10점(학점이수를 위한 최소 기준)을 넘기지 못하는 건가 하고 생각하고 있던 과목이라 한숨을 돌린 상황이다.
프랑스의 학점 제도는 우리나라와 상당히 다르다. A, B, C, D, F와 같이 알파벳으로 학점을 구분하지 않고, 20점 만점에 10점 이상의 점수를 획득해야 수업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20점 만점에 10점을 받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싶기도 한데, 막상 15점 이상의 점수는 정말 드물다고 한다. 모든 수업이 절대평가이므로 교수로서도 본인 기준에 만족스럽지 않은 문제풀이나 과제수행에 굳이 높은 점수를 주려 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학점 시스템과 비교하자면 A는 받기가 까다롭고 대부분 성적이 B에 분포해 있는 느낌이다. 앞서서 학점과 관련해서 지레 걱정했던 건 A 또는 B를 받지 못할 경우, C, D와 같은 중간 점수대를 별도로 두지 않은 채 곧장 F로 분류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대비를 하고 점수를 획득해야 좋은 평가를 받을지 감이 오지 않아 굉장히 막연했었다.
좋은 학점을 받는 문제에 관해 한국 학생들의 입장과 프랑스 학생들의 입장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상대평가냐 절대평가냐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20점 중 10점을 받았을 경우, 상대평가에 익숙한 우리나라 학생들은 좋은 학점을 받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지언정 수업을 이수하지 못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걱정할 일은 없을 텐데 (어쨌든 절대평가든 상대평가든 상위 50%에 든 과목이 과락에 처할 일은 없으므로), 절대평가에 익숙한 프랑스 학생들은 뛰어난 학점을 얻는 것보다는 학점 인정을 받지 못해 유급이 되는 상황을 걱정한다. 때문에 내가 과목 하나에서 13점을 받았다고 하면 주위에서는 잘 받은 점수라고 한다. 시험준비 단계에서부터 성적을 확인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가 전혀 예측되지 않아서 꽤 초조했던 나로서는 어쨌든 결과적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 이곳의 시험은 절차에 엄격하다. 종이를 원체 좋아하는 나라인 만큼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시험지도 참 고급스럽고, 피채점자의 인적정보를 가리기 위해 시험지 모퉁이 끝을 접어 가리게끔 탈부착 가능한 새하얀 스티커 같은 게 붙어 있다. (조금 쓸데없이 시험지가 예쁜 느낌이다..) 컨닝이나 표절에 엄격하지만, 그렇다고 시험감독에 엄격하지는 않다. 일단 응시자 수 자체가 현저히 적기도 하고—대부분 수업이 기껏해야 3~6명 수준—시험이 장시간일 경우 학생이 시험 중간에 텀블러에 물을 담아오고 싶다고 하면 그러라고 한다. 과장이겠지만 컨닝 자체가 발생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다. 이런 미묘한 차이에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시험 문제는 사실 우리나라에 비해 평이하다고 느꼈다. 쉽다고까지 말하면 과장이 되겠지만, 일단 가장 크게 받은 인상은 지엽적인 문제를 거의 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축적된 지식을 측정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곳의 시험은 그리 어렵다고 볼 수 없다. 대신에 자신의 생각을 적으라고 하는 문항이 꼭 있는 편이다. 예를 들면 이번 공공재정학 시험에는 자신이 정책 방향을 설득하는 상황에 있다고 가정하고 어떤 식으로 자신의 관점을 관철할 것인지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최대한 간결하게 서술하라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고 바칼로레아에 나오는 철학 문제처럼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건 아니어서, 사회과학 분야의 경우 어느 정도 우리나라와 시험내용이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정도의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출제된다. 다만 전체적으로 그래서 네 생각이 무엇이냐는 것(문제인식 방향)과, 그러한 생각을 전달할 때 사람들 앞에 나서서 어떻게 말을 하겠냐는 것(수사적 능력)이 크게 강조되는 편. 그래서 우리나라보다 발표 과제를 중시한다.
# 오늘은 하루 종일 학교에 있다가 저녁을 앞둔 늦은 오후 뤽상부르 공원에 온 N과 만났다. 루브르에서 오는 길이라는데 버거킹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저녁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도 배가 고파서 주문을 했다—뤽상부르 공원을 한 바퀴 돈 다음 생미셸 거리를 따라 걸었다. 생미셸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시테섬을 가로질러 퐁피두 센터까지 걸었다. 마레 지구의 초입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방향을 돌려 생루이 섬과 노트르담 성당을 지나 RER B 노선까지 왔다. N은 거의 14구에서 지내다보니 파리의 가장 오래된 구역이라 할 수 있는 3~6구 일대를 걷는 동안 파리 느낌이 난다는 말을 연발했다. 사실 파리에 도착한지는 나보다 오래되었고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N이다보니, 파리 지리에 완전히 어두운 걸 옆에서 보면서 내심 우습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팡테옹, 생제르망, 지베흐 조제프, 시테, 노트르담, 오텔 드 빌, 퐁피두 센터, 마레 지구,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이르기까지 센 강을 에워싼 명소들을 하나하나씩 설명 해주었다. 정말 N은 이 지역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오밀조밀한 풍경이 계속해서 바뀔 때마다 지금은 우리가 몇 구에 들어와 있는 거냐고 계속해서 확인했다. 사진 찍히는 걸 워낙 좋아해서 센 강을 배경으로 사진도 많이 찍어주었다. 내가 찍은 사진을 무척 좋아한다. 정작 어쩌다 내 사진을 남기자면 N의 사진술이 영 형편 없어서 각도나 위치가 삐뚤빼뚤이다. 그래도 오후의 농익은 햇살을 쬐며 센 강 일대를 훌훌 걷다보니 어느덧 세 시간이나 흘러 있었다. 생미셸 역에서 14구로 되돌아가는 N을 보내고 다시 팡테옹을 거쳐 기숙사까지 되돌아 왔다. 뤽상부르 공원에서 N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먹구름이 깔려 있던 하늘은, 이제는 걷힌 구름 사이로 밝은 햇살을 힘차게 쏟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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