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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의 일기 (上): 로댕 이야기(l'histoire de Rodin)Vᵉ arrondissement de Paris/Juin 2022. 7. 13. 15:35
# 마지막 수업 일정이 끝난 뒤 뭘 해야 좋을지 몰라서, 파리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씩은 들르는 장소들을 찾고 있다. 어제는 그렇게 해서 베르사유 궁전을 갔고, 오늘은 루브르를 가기 위해 아침부터 움직였다. 문제는 루브르 박물관은 사전 예매가 필요하다는 걸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 알았다는 점이다. 오후 티켓이라도 구해서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있었지만, 루브르 피라미드 앞 인파를 보니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루브르나 베르사유 궁전처럼 유명 관광지의 인파를 보면 코로나 이전에는 방문객 인파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결국 그냥 학교 기숙사로 되돌아 왔다.
# 오전에는 늘 찾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루브르 박물관을 대신해 로댕 미술관을 다녀왔다. 로댕 미술관은 앵발리드 옆에 면한 작은 미술관이다. 연면적으로 보면 오랑주리 미술관과 비슷하거나 좀 더 작은 것 같다. 하지만 작다는 것도 오르세 미술관이나 퐁피두 센터를 기준으로 했을 때이고, 작품의 퀄리티로 보자면 전혀 밀리지 않는다. 물론 발자크의 입상을 포함해 로댕의 많은 작품들은 오르세 미술관에도 많이 전시가 되어 있다. 하지만 로댕 미술관에서는 연대기 순으로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접할 수 있고, 그의 회화 작품도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의 연인이었던 클로드 카미유의 작품도 어김없이 전시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남녀의 손이 겹쳐지는 형상의 <비밀(Secret)>이라는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는 로댕의 작품이라고 하면 항상 청동이라는 소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옻칠을 두른 것처럼 거뭇거뭇한 바탕에 빛이 튕기는 위치에 따라 카라멜 색깔과 비취색이 미끄러지듯 떠올랐다가 걸음을 옮기면 이내 사라진다.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 발자크 입상은 대표적인 청동 작품들이다. 이들 청동 작품들은 처음 봐서는 금속성 물질로 만들어졌다고 느끼기 어렵다. 마치 방금 전 점토를 덧댄 것처럼 머리카락에 닿은 손길과 광대에 닿은 손길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로댕 미술관에는 그의 대리석 작품들도 많다. 연인들, 비밀 같은 작품들이 그렇다. 대리석이 제공하는 느낌은 청동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청동의 질감이 만들어내는 광택은 없지만, 조각의 음영(陰影)은 오히려 더욱 뚜렷하다. 청동의 단단하고 거친 질감 대신 대리석 표면은 부드럽고 반들반들한데, 상아색 곡면을 따라 흘러내리는 은은한 그림자 덕분에 조각의 들어가고 나옴을 느낄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대체로 연인이나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고, 청동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위인이나 역사적 사건, 종교적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그밖에 로댕이 수집한 토속적인 고미술품이나 특정한 소재—손이나 발, 얼굴—를 반복적으로 만든 습작도 전시되어 있어서, 평소에 좋아하던 로댕이라는 예술가를 이해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곳이었다. 루브르에 비해 관광객이 확실히 적기 때문에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 그럼에도 건물 안에 전시된 작품들이 어딘가 한방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로댕 미술관의 진짜 전시는 정원에서 시작된다. 정원에는 세 명의 망령을 비롯해서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처럼 가장 알려진 로댕의 작품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정원의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 작가 왕커핑이 와서 아마도 인터뷰와 화보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대한 목탄을 갖고 작업을 하는게 작가의 특징인 모양이었다.
정원에는 베르사유의 트리아농을 연상케 하는 아담한 정원이 잘 가꿔져 있다. 각양각색의 장미와 수국들이 모록모록 피어 있고, 조경수들은 가지치기가 잘 되어 있다. 햇살이 강한 오후였는데 동그란 분수를 에워싸고, 머리에 선글라스를 쓴 시민들이 삼삼오오 일광욕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정원을 둘러보는 동안 관목 너머에 육중하게 올라선 앵발리드는 내가 지금 6구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끝으로 로댕의 대표작인 지옥의 문 앞을 빙 둘러서 미술관을 빠져 나왔다. 자비에 교회 앞에서 82번 버스를 타고 학교 기숙사로 되돌아 왔을 때는 아직도 해가 높은 오후 다섯 시 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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