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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작은 글—6월의 프롤로그Vᵉ arrondissement de Paris/Juin 2022. 7. 2. 03:33
5월 마지막날을 끝으로 학기가 끝난 뒤, 나는 스물 하고도 이틀을 프랑스에 더 머물렀다. 일주일 가량은 남프랑스를 둘러보기도 했고 사흘 정도는 야간버스를 타고 런던에 다녀왔으니, 파리에서 남은 일정을 마무리한 기간은 매우 짧다. 6월에 남긴 내 기록은 7~8일 쯤 어딘가에서 멈춰 버렸다. 일단 시작된 기록은 매듭지어져야겠지만, 지나간 기억들을 일일이 소환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기도 하고, 정신 없이 흘러가버린 6월의 기록을 과연 ‘파리 5구’라는 테마 안에 묶어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날짜가 아닌 주제별로 기록을 뭉뚱그려 정리해 보려고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또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결국 원래 정리하던 대로 날짜별로 기록을 갈무리해보기로 했다. 다소 수고롭기는 하겠지만.
5월 31일 학기가 끝나고 내 상태는 ‘혼란’ 그 자체였다. 당시에는 정체를 전혀 알 수 없는 혼란이었다. 일단은 학기가 끝난 데에서 오는 급작스런 이완감이 가장 컸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파리에서 더 이상 할 게 남아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러니까 내 앞에 주어진 일이 더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허무함 같은 것도 급속히 밀려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기가 끝난 뒤 며칠은 일단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는 게 옳은 선택이었던 것을, 당시에는 급작스런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가보지 못한 파리 시내 관광지를 부랴부랴 찾는다든가, 친구와 무리하게 약속을 잡는다든가 하며 에너지 소모를 재촉했다. 하나의 미션이 완수된 뒤에도 끝모를 갈증 같은 게 느껴졌던 것 같다.
사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당장 프랑스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수 차례 했었고, 체류 후반부 몇 번은 처음 말을 튼 사람에게 파리에는 두 번 다시 올 일이 없을 거라고 단언하기도 했었다. 반 년의 파리 생활에 꽤 지쳐 있었던 것이다. 학기가 끝난 뒤 용케 뛰어난 성적을 받은 과목을 보며 흡족스럽기도 했지만, 파리에서 고생한 것 이상으로 나는 프랑스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더 건져 가야만 속이 후련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보상심리에 비해 파리에서의 체류는 여전히 어딘가 불만족스럽고 확고하지 않았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건강이 대체로 나빠지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내 체중은 출국 전보다 8kg이 줄어 있었다. 대충 몸무게가 줄었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구체적인 건강 상태를 알 리 없었던 나는 6월 초 남프랑스로의 여행을 추진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난 여행에서 마지막 도시였던 리옹에 이르렀을 즈음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체력도 내게 주어진 시간도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마르세유에서 니스로 넘어가는 길에는 귀국 비행편을 앞당겼다.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이미 한 차례 일정이 조정된 비행편이었다. 비행편을 앞당기고 나서는 내 충동적인 결정에 많이 후회했다.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단연 행정 시스템이었다. 아무런 잣대가 없고 내 시간을 아주 가볍게 여기는 각종 절차들을 처리하기 위해, 학기 내내 학업에 투입하는 것 못지 않는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해야 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까지도 필요한 사후 행정처리가 총체적 난항이다.) 또한 어떤 커뮤니티에 분명하게 속해 있지 못하다는 사실도 나를 불안하게 했다. 상당히 폐쇄적인 프랑스 학생들의 교우 관계에 대한 자연스런 반작용이랄지, 많은 국제학생들도 학기초의 개방적인 모습에서 차츰차츰 자국 학생들끼리 소그룹을 이루어 어울리는 양상으로 바뀌어 갔다. 그나마 내가 들었던 수업들은 상대적으로 학생 구성이 다양한 편이어서 친구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정보가 꽁꽁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이곳 고등사범학교에서 오로지 혼자서 내게 필요한 학사 정보와 생활 정보를 실시간으로 챙긴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벅찬 일이었다. 한국에서 전해져 오는 내가 어찌 해볼 도리 없는 개인적인 소식들을 접하고 난 뒤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일쑤였고.
귀국 비행편을 확정한 이후 나를 엄습한 건 공교롭게도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마주하게 될 과업들에 대한 또 다른 거대한 압박감이었다. 진퇴양난(進退兩難). 물러설 곳이 없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고, 이제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나는 지금 어딜 향하고 있는 거지?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지만,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떠나야 할 때가 되었지만 떠나야 할 곳으로 갈 수가 없다. 떠날 곳을 알지만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마치 사지(死地)로 향하는 기분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너무나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결정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 순간 앞선 결정을 번복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출국을 며칠 앞두고 런던에 머물던 이틀 째 밤, 나는 마음을 추스르며 지난 반 년간 파리에서의 체류를 단 하나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고통스럽기도 했지만—그렇다 분명 고통스러웠고 6월 한 달은 특히나 더 그랬다—그러한 까닭에서인지 파리에서의 하루하루는 모든 것이 기억에 흐릿한 부분 없이 선명하다. 매일마다 걷던 윔 가의 일방통행로, 게 뤼삭 거리에 늘어선 오스마니안 양식의 유백색 건물들, 학교 입구의 아주 커다란 마로니에 나무, 도서관의 자주색 카펫, 기숙사의 어두운 복도, 초록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나간 내 방문. 끈기 있게 수업을 이끌어가던 재정학 교수의 예리한 시선, 사회과학 수업에서 조리 있게 교수에게 질문을 던지던 물리학과 여학생, 한국의 남북 분단에 대해 궁금해 하던 독일과 캐나다, 영국 친구들의 진중한 표정, 늘 같은 시간 영화관 매표소를 지키던 무표정한 청년, 그리고 단골로 찾던 카페의 사장님. (터줏대감 같은 이 카페가 없었다면 파리 생활을 버틸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도 더 있다. 심심하면 24번 버스를 타고 나가 시간을 보내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서점, 내게 큰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라 필모테크 뒤 캬흐티에 라탕,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틈날 때마다 산책하던 뤽상부르 공원과 식물원. 기숙사에 멍하니 앉아 있으면 늦은 시각 창밖으로 들려오던 24번 버스의 엔진 소리, 교정을 나서는 학생들의 왁자한 대화, 메트로의 안내방송. 고통이라는 점토 위에 파리에서 배우고 느꼈던 색색의 조각들이 어느 순간 모자이크를 이루었다. 아직까지는 모자이크의 완성된 형태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모르겠다. 지금의 기억은 시간이 흘러 더 보태지기도, 잘려나가기도 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3주에 이르는 남은 기록의 단추를 하나씩 차근차근 채워보고자 한다.
[모든 것은 단단한 의지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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