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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일상/book 2022. 8. 27. 17:40
프랑스에서 돌아온 뒤 독서량도 영화를 보는 횟수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새로운 활자들, 새로운 구문들과의 사투 아닌 사투를 벌이면서, 유희로써 텍스트를 접하는 일마저 거추장스럽게 느끼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다행히 반대급부에서 순기능적인 측면이라면, 드문드문이나마 글을 찾아 읽을 때는 우리 문학을 찾아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받아들이고 소화하기에 편한 글을 찾게 된 것이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에는 박경리 작가의 소설이 재밌어서, 비싼 국제운송료를 감수하면서까지 박경리 작가의 책을 추가로 주문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국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찾아보고 있는데, 수필을 읽는 건 국내작품과 해외작품을 막론하고 실로 오랜만이다.
독서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독서를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 때로 다양한 언어의 텍스트들을 읽곤 했었는데, 푹 빠져서 읽었던 어떤 책들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먹먹한 기분이 든다. 지금에 와서는 그 먹먹한 기분을 주었던 작품들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현대 소설이 아닌 시간이 좀 된 소설 작품들이었을 것이다. 마음에 굳은살이 붙을 만큼 붙은 나이가 되어서인지, 그 먹먹함도 쉽게 오는 것이 아니고 그리 강렬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다가 하루는 모처럼 아침에 마음먹고 카페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뇌리에 어떤 구절이 내리꽂혀서도 아니고, 슥슥 문장들을 읽어내려가다 문장 사이의 어느 지점에 반사작용이 일어나듯이 눈물이 났다.
물론 작가의 글에서 마음에 드는 글귀를 여럿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나이 마흔에 직업으로써의 글을 쓰기 시작한 용기와 삶의 성가신 굴레들을 견뎌내는 생명력, 시간의 중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체념하지 않는 담대함같은 것이 마음을 크게 동요하게 했던 것 같다. 요 근래 아침저녁으로 마음의 허기를 일깨우는 가을 공기가 일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걸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맑은 하늘엔 구름이 표표히 흐르고, 그런 하늘과 닮은 작가의 마음이 담긴 이 책을 덮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고향에 감사하고 싶은 것은, 훗날 내가 글을 쓰게 된 것이 나의 시골뜨기 근성에 힘입은 바가 크기 때문이다. 사교적인 모임뿐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여러 갈래의 우호적 또는 적대적, 정열적 혹은 타산적 관계의 와중으로 끼어들지 못하고 조금 비켜나 있고 싶어 하는 근성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점점 내 성격 형성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비켜나 있음을 차라리 편안하게 여기게 되었고, 와중에 있는 것보다는 약간 비켜나 있으면 돌아가는 모습이 잘 보인다는 것도 터득하게 되었다.
비켜나 있음의 쓸쓸함과,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사람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거리를 가장 잘 보이게끔 팽팽하게 조절할 때의 긴장감은 곧 나만이 보고 느낀 걸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로 이어졌다.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고 나면 인간관계에서 비실비실 비켜나 있음이 촌스러울 뿐 아니라 떳떳지 못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자격지심이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도 글 쓰는 보람이다.
—p. 216~217
그러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p. 231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일몰 무렵이었으면 참 좋겠다.
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산산함 대신 우수가 흐르고,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내 기억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해도 어느 조촐한 툇마루,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내 어릴 적 동무들의 이름을 되살려낼 수 있으면 나는 족하리라.
—p. 239
때로는 나에게 죽음도 희망이 되는 것은 희망이 없이는 살아 있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p.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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