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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은 인간의 목측이 자진(自盡)하는 한계선이다. 인간의 시선이 공간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죽어갈 뿐, 하늘과 땅이 닿을 리는 없는 것이다.
—p. 39
나는 교회의 첨탑이나 사찰의 석탑이 견딜 수 없이 답답하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곳이 자유나 초월적 가치라 하더라도 그 자유를 그토록 간절히 지향해야 하는 긴장과 자기 학대를 나는 견디어내지 못한다. 내 고향의 수직구조물들은 이제 신성이나 초월적 가치를 모두 버렸다. 그것들은 신석기의 선돌이나 중세의 첨탑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제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p. 106
그 정신주의는 행려와 표랑, 세상으로부터의 겉돌기와 헤매기, 외로움과 막막함, 눈물과 고통과 그리움에 의해 매우 잘 절여진 것이어서, 정신주의는 승천하지 못하고 세상의 지표 위로 아주 낮게 깔리면서 세상의 마을과 마음을 자리잡게 한다. 나는 그 정신주의에서 제 혀를 빼서 제 상처를 핥는 짐승의 외로움을 보았다.
—p. 114
태생(胎生)은 곧 습생(濕生)인 것이어서, 슬픔과 기쁨과 욕망의 절정에는 늘 물이 흐르고 습기가 고이는 모양이다. 가을산과 가을의 물과 거기에 내리는 빛은 풍장(風葬)의 흰 뼈를 생각게 했고, 습기 많은 나는 아직도 내 몸의 습기를 말리지 못한다. 가을 강가에서 나는 습기에 질퍽거리는 내 몸속의 물소리를 들었다.
—p.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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