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처럼 최승자 시인의 수필집을 집어들었다. 최승자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을 읽은 적은 있지만, 수필집을 읽어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최승자 시인의 시가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시집을 찾아보는 것보다 수필집이 더 홀가분하게 읽힐 것 같아 이 책을 고른 것도 있다. 손에 꼽을 만큼 시를 읽는 나로서는 아직까지 운율이라든가 압축이라든가 하는 것보다는 줄글이 더 편하기만 하다.
산문집을 포함해 그녀의 시는 대체로 인간 내면의 어둡고 공허한 부분을 다루고 있어서, 수필집도 내용이 무거우려나 궁금했는데 다행히 <어떤 나무들은>에 담긴 그녀의 일상은 평범하고 익살스럽기도 하다. 이 책은 부제(副題)가 말하듯이 작가가 아이오와에 가서 다른 3개월 남짓 다른 나라에서 온 작가들과 교류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전혀 다른 세계에 동떨어져 어설프게나마 좌충우돌 적응해 나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쩐지 작년 봄여름 내가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 떠올랐다.
94년도에 겪은 일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 보면 새로울 게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기도 한데, 그 내용들이 상세히 기록으로 남겨져 있어 개인의 블로그를 들여다보듯이 재미있게 읽었다. 거꾸로 말하면 94년 이후 기껏해야 30여 년이 흘렀을 뿐인데 그 사이 세상은 얼마나 바뀐 것일까 하고 생각해본다. 책에는 학생 때 그녀가 습작했던 시와 그녀가 개인적으로 아끼는 시, 또는 시에 가까운 산문들이 등장하는데, 나는 그 문장들이 퍽 마음에 들었다. 다음번에는 다시 한번 그녀의 시집을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Lonely rivers going to the sea give themselves to many brooks." 이건 내가 슬며시 외로운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다시 되살려보곤 하는 구절이다. "바다로 가는 외로운 강물은 많은 여울에게 저를 내준다."
-p.49동양적인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완결되어 있으므로 프로그레스가 없다. 발명과 발견은 단연코 서구의 것이다. 아니 최초의 발견은 동양의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발명은 단연코 서구의 것이다. 하나하나를 겪으면서 전체를 향해 나아가는 것과, 처음부터 전체를 상정하고서 세부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 둘 간의 차이, 그리고 그 둘 간의 무한한 상호보완성, 그게 동양과 서양의 만날 수 없는 점이고, 또한 만날 수 있는, 만나야 하는 점일 것이다.
-p.143
무슨 분야든지, 시 쓰는 일, 번역하는 일, 하다못해 삯바느질하는 일에서까지도 결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생각된다. 자기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 자기에게 속아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
-p.221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씁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평화
-p.246
기억의 집. 기억의 집 한 채 서 있다. 기적처럼, 금방 신기루처럼 무너질, 그러나 기적처럼.
-p.248"나는 프로그램화된 사회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 문장의 배경을 이루는 감정은 이런 거다. 나는 이 프로그래밍에 더 이상 적응하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프로그램화되지 않겠다.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내게 강요되었던 가치관의 정체를 내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런 가치관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보지 않을 때, 내가 현재를, 미래를, 시간을 더 이상 감옥으로 보지 않게 될 때 나는 어떤 가능성의 입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p.369~370'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린 사회와 그 적들 I (0) 2023.07.25 코무니타스(Communitas) (0) 2023.07.19 중력과 은총 (0) 2023.06.0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1) 2023.05.29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0) 2023.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