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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시몬 베유에 관한 글귀를 발견하고 그녀의 글을 읽어보았다. <중력과 은총>은 국내에 번역된 몇 안 되는 그녀의 글 중 하나인데, 메모에 가까운 그녀의 짧은 글들을 엮어놓은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있게끔 글들을 엮어놓았다고는 하지만, 기승전결이 있는 글은 아니라서 소제목을 보고 읽고싶은 부분을 그때그때 읽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 글의 특성상 그녀의 흩어진 생각을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 책의 제목인 <중력과 은총>에서 중력은 하강하는 에너지로써 상승하는 에너지인 은총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소개된다. 유한한 인간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 하강으로 이끄는 에너지로써 중력과 같은 것들로는 인간의 유한한 상상력, 욕망, 악이 거론된다. 이런 것들은 중력과 같아서 인간과 가까운 곳에서 힘을 미치고 강력한 인력을 지닌다.
반면에 상승 운동으로써 은총은 종교적 세계 즉 영적 세계에서 이뤄지는데, 땅 위에 두발 딛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에너지의 흐름이다. 신만이 아는 선은 바로 이 은총의 범주에 속한다. 시몬베유의 말은 조금 가학적인 면이 있어서, 인간이 중력이라는 에너지에 매여서 풀려날 수 없다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다고 단언한다.
다만 글의 후반부로 가면 내가 가장 기대하는 대목이었던 ’주의력‘에 대한 글이 등장하는데, 인간이 비록 은총을 통해 완전한 선에 다다를 수 없고 이미 우리의 세계의 무너져내렸다고는 하지만, ’주의력‘을 통해 은총에 한 걸음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인간 의지‘라는 것은 우리 존재에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해내야겠다는, 무언가를 이뤄내겠다는 일종의 상상력 발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초연하게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고 주의력을 쏟는 것, 자신이 이 세계에서 바라보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나‘와 접하고 있는 매개물(메타크쉬)이라는 인식을 지니는 것이 상승 에너지로 도약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이다.
그런 그녀의 논지는 크게 두 가지 시공간적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해야 할 텐데, 첫째 그녀는 유대계 프랑스인으로서 세계대전을 거치며 인간성의 타락을 목도하며 이 세계의 선과 악에 대해 깊이 사유했던 것 같다. 둘째, 바가바드 기타와 같은 고대 인도철학과 프랑스 남부 지역의 가톨릭교는 그녀로 하여금 인간의지보다도 겸허함과 수양에 초점을 맞추도록 했던 것 같다. 물론 은총과 중력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여전히 기존의 성서가 말하는 선악관을 드러내보이지만 말이다.
시몬 베유가 말하는 ‘주의력을 철학’을 읽기 전까지는 평화로운 느낌의 글을 예상했는데, 그녀의 글을 읽는동안 내용이 비장하고 비관적이기까지 해 내심 놀랐다. 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녀는 그만큼 투철하게 인간과 사회에 천착하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 같아 또 다른 의미에서 놀라기도 했다. 긴 문장이 많지 않아 원어로 읽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글이었다. [fin]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빈자리를 견디기, 따라서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의미한다. 진리는 죽음 쪽에 있다.
―p. 20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이 더 이상 내가 보는 것들이 아니게 됨으로써 완벽하게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나는 사라져 버렸으면.
―p. 60
목표를 위하여 행하지 말고 필연에 의하여 행할 것. 할 수밖에 없다. 행동이 아니라 일종의 수동(受動)이다. 행하지 않는행동.
―p. 64
모든 것 가운데 오직 예기치 못하게, 대가 없이, 운명의 선물처럼 밖으로부터 오는 것만이 순수한 기쁨이다. 실제의 선 역시 오직 밖으로부터 온다.
―p. 67
죄 없는 사람이 지옥을 느낄 수 있다.
―p. 100
선에서 선함을 제거하는 비실재성, 그것이 바로 악이다. 악은 언제나 선이 실재하는 지각 가능한 사물들을 파괴한다.
―p. 105
악은 강함과 이어지고, 존재와 이어진다. 선은 약함과 이어지고, 무와 이어진다.
―p. 140
무한은 일자(一者)가 겪는 시험이다. 시간은 영원을 시험하고, 가능성은 필연을 시험하고, 변이는 불변을 시험한다.
―p. 144
악, 그리고 신의 순결. 악이 없는 순결한 신을 생각하려면 신을 무한히 먼 곳에 놓아야 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악이 우리에게 신을 무한히 먼 곳에 놓으라고 가르쳐준다.
―p. 148
주의력은 욕망과 이어져 있다. 의지가 아니라 욕망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겠다는 동의에 이어져 있다.
…….자기 안에서 그 일이 일어나길 바라야 한다. 진정으로 바랄 것, 실행하려고 시도하지 말 것. 모든 시도는 헛되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냥 바라기만 할 것. 내가 ‘나’라고 지칭하는 모든 것이 수동적이어야 한다. 나에게서 필요한 것은 ‘나’가 사라져버릴 정도로 충만한 주의력뿐이다.
―p. 158~159
창조된 사물들은 본질적으로 매개물이다. 각자가 서로에게 가기 위한 매개물이고, 끝없이 이어진다. 창조된 사물들은 신으로 가기 위한 매개물이다.
―p. 193
집단적인 사고는 사고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물들로 옮겨 간다. 그로 인해 역설이 가능해진다. 즉, 이제 사물이 생각하고 인간은 사물의 상태로 환원한다.
―p.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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