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형상 이론과 국가론은 정치철학에서 어김없이 다뤄지는 주제다. 나 또한 별 다른 의문 없이 흔히 국가에 대한 최초의 고찰로 일컬어지는 플라톤 철학을 기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내게 생소하면서도 파격적이다. 칼 포퍼는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기치 아래, 플라톤의 역사주의적·자연주의적 사유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
칼 포퍼에 따르면 플라톤의 철학은 사회과학에서 지나치게 숭앙(崇仰)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하지만 칼 포퍼가 볼 때 플라톤의 국가 철학은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결여하고 있다. 플라톤 철학은 역사주의와 탐미주의, 자연주의 등 과학적 사고와 무관한 방법론에 매몰된 나머지, '변화를 불경한 것으로, 정지를 신성한 것으로' 보는 관점을 합리화하는 데 매진한다.
특히 플라톤은 민주정치를 경멸하고 현자에 의한 철인 통치를 옹호함으로써, 확고한 계급체제 확립에서 나아가 우생학적 논리를 펼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플라톤의 개인사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 칼 포퍼는 추론하는데, 귀족 출신인 플라톤은 아테네에서 귀족 정치가 몰락하고 민주정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역사적 변화를 일종의 부패 과정으로 보는 비관적 역사주의 관점이 생겼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칼 포퍼에 따르면 사회과학이 하나의 과학으로서 천착해야 하는 주제는, 좋은 정치에 철인이 필요하다는 형이상학적 이야기나 계급체계의 공고화를 위해 지식 전수를 제한해야 한다는 엄숙주의가 아니라,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마주하며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과학은 최선이 무엇인지 고민할 것이 아니라, 최악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 고민에 뿌리내려야 한다.
칼 포퍼의 논지는 플라톤 철학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지만 그 나름의 한계가 있다. 민주적 가치와 사회 변화를 긍정하지만, 가능한 범위 안에서 점진적으로 사회적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주장은 언뜻 보수주의나 점진주의로 비춰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민주적 가치를 추구하는 칼 포퍼와 같은 인물이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음에도, 나치의 출현을 저지할 수 없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아마도 이런 물음표들은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을 출발점으로 삼는 책의 후반부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모든 사회적 변화는 타락이나 부패 또는 퇴화인 것이다. -p.39
요컨대 플라톤이 주장하는 바는 변화는 사악하고, 정지는 신성하다. -p.70
자연은 사실과 규칙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 그 자체는 도덕도 비도덕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자연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연에 표준을 부과하고, 이런 식으로 자연세계에 도덕을 도입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p.109
지배자는 지배하고, 노동자는 노동하고, 노예가 노예일 수 있다면, 국가는 정의롭다. -p.155
플라톤의 도덕법전은 엄격한 공리주의로, 집단주의자나 정치적 공리주의의 법전이다. 도덕성의 기준은 국가의 이익이다. -p.178
모든 장기적인 정치는 제도적인 것이다. 플라톤에게서조차도 그것을 피할 길은 없다. -p.212
'타협'이란 좋지 않은 말이지만, 우리가 그 말의 적절한 사용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비록 사람인 우리들은 상황, 이해관계 등과 같은 영향에 저항해야 하겠지만, 제도란 불가피하게 이런 것들과의 타협의 결과이다. -p.266
마술적 사회나 부족사회 혹은 집단적 사회는 닫힌사회라 부르고, 개개인이 개인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회는 열린사회라 부르고자 한다. -p.293
비록 소수의 사람만이 정책을 발의할 수 있다 해도, 우리 모두는 그것을 비판할 수 있다. 우리는 논의를 정치적 행위에 대한 장애물로 보지 않고, 현명한 행위를 위한 하나의 불가피한 예비행위로 본다. -p.311
민주주의에 대한 호의적인 비판과 악의적인 비판을 구별할 수 없는 민주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이 전체주의적 정신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는 물론 어떠한 비판도 호의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권위에 대한 모든 비판은 권위 자체의 원리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p.315
일단 우리의 이성에 의존하기 시작하고 우리의 비판력을 활용하기 시작한 이상, 개인적인 책임의 요구와 더불어 지식의 증진을 위해 조력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 이상, 우리는 부족적 마술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국가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지식의 열매를 먹은 자는 천국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부족주의의 영웅적 시대로 돌아가려 하면 할수록, 우리는 종교재판에, 비밀경찰에, 낭만화된 깡패행위에로 가는 것이 더욱 확실해진다. 이성과 진리를 억압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가장 야만적이고 포악한 파괴로 끝내고 말 것이 확실하다. 자연의 조화된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되돌아간다면 우리는 길 전체를 다 가야만 한다. 우리는 금수로 돌아가야 한다. -p.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