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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카테고리 없음 2025. 4. 2. 17:35
이중 하나는 거짓말/김애란/문학동네 어둠 속에서 용식의 노란 홍채가 고요히 빛났다. ……여러 번 허물을 벗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인 채 존재하는 기분은 어떨지 궁금했다.
―p. 59
채운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날 일을 떠올렸다. 속으로 ‘또 시작이다’ 중얼거렸던 날. ‘하지만 이건 매번 시자되는 시작이라 시작이 아니다’라며 괴로워한 밤을.
―p. 76
왠지 봐서는 안 될 이 세계의 비밀스러운 표정 하나를 얼핏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p. 121
서로 시선이 꼭 만나지 않아도, 때론 전혀 의식 못해도, 서로를 보는 눈빛이 얼마나 꾸준히 그리고 고요히 거기 있었는지 보여주는 거였다. 그러니까 말이 아닌 그림으로. ……그런 앎은 여러 번 반복돼도 괜찮을 것 같았다.
―p. 132
―있지, 사람들 가슴속에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그런데 모를 리 없는 저열함 같은 게.
―p. 140
채운이 생각하기에 논리로 설명 가능한 일은 대부분 ‘그래서’와 ‘그런 뒤’ 다음에 일어났다. 반면 흥미를 끄는 쪽은 ‘그런데’나 ‘한편’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접속사 없이도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있었다.
―p. 159
희생과 인내가 꼭 사랑을 뜻하는 건 아닌데, 그때 나는 이해라는 이름으로 내 안의 두려움을 못 본 척했던 것 같아.
―p. 176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아, 채운아.
―p. 182
이전만큼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게 된 얼굴. 얼핏 보면 삶을 다 이해한 것 같고 또 다르게 보면 이해를 멈춘 얼굴 같았어.
―p. 190
그 순간 소리는 엄마가 속삭이는 말을 드른 것만 같았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누군가를 잡은 손과 놓친 손이 같을 수 있다’고.
―p. 191
어째서 삶이 누구나 먹고 싶어하는 탐스러운 과일이라도 되는 양 굴었을까? 내가 원했으니까?
―p. 194
지우가 이해하기로 지우개는 뭔가를 없앨 뿐 아니라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상에 빛을 드리우고 그림자를 입힐 때 꼭 필요했다.
―p. 200
거기 대단한 폭력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곧 거대한 폭력이기도 했다.
―p. 202
한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이야기란 고작 이 정도’라고 냉소하다 ‘그럼 내가 조금이라도 이야기의 흐름을 바꿔보겠다’ 마음먹고 여기 왔는데, 결국 자신에게 주어지는 결말이란 이런 거구나 싶어 가슴에 냉기가 돌았다.
―p. 214~215
자신은 지상에 박힌 압정처럼 하나의 점으로 가까스로 존재하는데 ‘서사 그래프’에 나오는 그 약동하는 선을 가진 이들이 부러웠다.
―p. 216
이 게임의 목적은 얼핏 ‘거짓 가려내기’ 같지만 실제로 이 게임에서 중요한 건 ‘누구나 들어도 좋을’ ‘아무에게나 말해도 되는’ 진실만 말하는 거였다. 당연했다. 누구도 초면에 무거운 비밀을 털어놓지는 않으니까.
―p. 226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이 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p.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