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영화관에서 본 <미세리코르디아>라는 프랑스 영화를 두고 30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다. 내 추천으로 얼마전 도서관에서 DVD를 빌려왔다는 할머니는 딸과 그녀의 남자친구와 함께 집에서 영화를 봤다고 했다. 있을 법하지 않은(invraisemblable) 에피소드들을 공유하는 동안 할머니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웃으셨다. 특히 극중 제레미의 혐의를 풀기 위해 신부가 나체 상태로 경찰에게 강변하는 대목을 이야기할 때, 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웃음을 터뜨리셨다.
뒤이어 할머니는 프랑수아 오종의 이방인이라는 영화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지인 중 한 명이 영화관에서 새로 나온 영화를 보자는 제안에, 자신의 남편(compagnon)을 포함해 비슷한 또래 넷이서 영화관에 가기로 했다고. 그런데 영화를 보러가기로 한 하루 전날 영화를 보자고 제안했던 그 지인이 병원에 실려갔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이튿날, 그러니까 예정대로라면 영화를 보기로 한 날, 지인 분은 돌아가셨다. 심혈관 질환이 사인이었지만 평소에는 아주 멀쩡한 분이었다고 했다.
아직까지 프랑스어 듣기가 수월하지 않은지라, 처음에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프랑수아 오종이 새로 발표한 작품의 시놉시스를 설명하는 줄 알았다. 내 듣기에 빈틈이 있다는 걸 잘 아는 할머니는 내가 내용을 되묻자 연음 없이 또박또박 느리게 문장을 반복했다. 순간 화상으로 이제는 슬픔으로 젖은 할머니의 눈가가 보였다. 급작스런 비보는 사람의 마음이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나중에 돌아보건대 할머니는 아마도 그날의 대화에서 내게 지인의 일화를 꼭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일부러 다른 영화 이야기로 감정을 내려놓고,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이번에는 진짜 들려주고 싶은 말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현실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invraisemblable) 일이 살다보니 있더라. 인생을 살고 보니 그런 게 인생인가 싶다" 서울에서 만 킬로미터 떨어진 이국의 도시에서 내뱉은 할머니의 마지막 한 마디는 디지털 신호로 변환된 채 화면 속에서 무감각하게 흘러나왔다. 오롯이 문장에 의지해 삶에 대한 무감각이 아닌 초연함을 간신히 읽어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슬픔을 공유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다가가 의지가 되어주는 동시에 내가 그만한 버팀대가 되어 줄 수 있는지 한발 물러서서 질문하게 되는 일인 것 같다. 한편으로는 선뜻 내게 말을 건네준 할머니에게 나라와 나이, 살아온 시대를 넘어선 유대(紐帶)를 느꼈다. 먼 땅에서 이진법의 파동으로 전달된 할머니의 목소리는 묘하게 비현실적인 느낌이 있었지만, 어쩌면 그마저도 눈동자가 마주보이는 거리에서 나누는 대화조차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마치 영화 속에서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일이 삶에 닥쳐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