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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역사 서술은 제국 역사를 오랫동안 두 가지 주요 단계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18세기 후반에 끝난 중상주의 제국 시대였다. 두 번째는 19세기 말에 갑자기 등장한 '신제국주의' 시대였다. 그사이에는 제국주의가 침체된 시기가 존재했고, 비공식 제국이라는 개념이 그 간극을 메웠다.
......가장 일반적 측면에서 제국은 팽창이라는 좀 더 넓은 범주의 하위유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팽창하는 국가나 사회가 반드시 제국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지배하거나 종속하려 하지 않아도 상품, 인력, 사상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다른 국가나 민족을 지배하려는 의도를 명백히 드러낸다. 제국주의는 팽창을 제국과 연결하지만, 제국 없이도 존속할 수 있다. 의도한 바가 결과로 이어지는 성공한 제국주의는 세 가지 가능한 결과를 불러온다. 첫 번째는 공식적 제국formal empire의 설립이다. 지배 세력은 무력이나 협상으로 영토를 병합하고 해당 정치체제의 법적 · 정치적 독립성을 박탈하며 종속 지역의 대내외 정책을 자국의 우선순위에 최대한 부합하도록 만든다. 두 번째는 비공식적 영향력 또는 비공식 제국의 형성이다. 이 경우 종속국의 법적·정치적 독립성은 손상되지 않으나, 지배 세력은 제한된 범위에서 다른 주권적 요소들을 축소하거나 재구성하여 자국의 이익에 맞추게 된다. 세 번째는 제국주의적 행동이 영토를 통합하고 평등에 기초해 국민을 동화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단일 국가 또는 국민국가로 귀결된다.
―p.70, 77
제국의 두 가지 추가 특징은 이후 전개하는 논의에서 핵심이기에 이 시점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공식적 제국의 영토적 특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제국의 권위는 획득한 토지의 사용뿐 아니라 소유권까지 주장하는 데서 비롯했다 이른바 '해양 제국maritime empires'은 끝없는 항해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대양 항해는 육지에 도달하고, 기지를 확보하고, 가능한 한 내륙을 탐사하는 수단이었다.
......두 번째는 공공재(외부 효과)를 공급하는 제국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공공재는 행정, 안보, 인프라, 법률, 교육, 통화 시스템 제공과 같은 광범위한 서비스로 경제학 용어로는 '배타적 소유 불가non-excludable'에 해당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공재 '비경합적non-rivalrous'이어서 어느 한 사람이 혜택을 누린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덜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니다.
―p.78~79
......명예혁명은 주로 근대성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개념 사이의 투쟁이었다. 제임스 2세와 윌리엄 3세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려 한 근대화론자로 나타나지만, 그 성격은 서로 달랐다. 제임스는 절대주의의 회복을 목표로 했고, 윌리엄은 민주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좀 더 참여적인 국가를 선호하였다. 제임스를 지지한 토리당은 토지에서 가치가 파생된다는 전통적 주장을 고수하였다. 윌리엄을 지지한 휘그당은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존 로크John Locke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제임스는 보호 관세를 유지하려는 대지주들에게 호소한 반면, 혁명 지지자들은 상업, 제조업, 금융기관, 자유무역을 선호했다. 두 입장은 전 세계에서 영국의 역할에도 영향을 미쳤다. 부의 기반이 고정된 자원인 토지에 있다면 해외 정책은 영토 획득을 목표로 해야 했다.
―p.120
1763년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 정부가 18세기 중엽에 벌어진 장기간의 전쟁에서 자신들이 보여준 충성심에 보답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식민지 주민들의 기대는 곧 환멸로 바뀌었다. 인도에서 수입원을 찾아 나선 영국의 재정 압박은 북미 본토의 식민지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7년 전쟁 이후의 시기는 잘 알려진 일련의 경제적·정치적강압 조치로 특징지어졌다. 설탕법Sugar Act, 1764과 통화법Currency Act, 1764 인지세법Stamp Act, 1765 으로 시작된 이 조치는 타운센드법Townshend Acts, 1767을 거쳐 차법Tea Act, 1773과 강제법Coercive Acts, 1774 으로 절정에 달했다. 인지세법과 일부 타운센드법 조항은 식민지의 격렬한 반대로 각각 1766년과 1770년에 철회되었지만, 영국 정부의 근본적인 강경 노선을 바꾸지는 못했다. 제국주의 통제권을 재확립하려는 영국의 노력은 식민지 주민들의 높아진 기대를 꺾었으며, 그들의 충성심도 서서히 허물었다.
―p.212~213
헌법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하나로 묶는 데 성공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를 의도적으로 미뤄둠으로써 결국 미국의 정치체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연방 탈퇴 문제였다. 만약 궁극의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면, 연방에서 탈퇴하겠다는 결정은 반란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의 행사라고 주장할 여지가 있었다. 이러한 논리는 최소한 19세기 전반에 탈퇴 문제가 현실 정치의 영역으로 떠올랐을 때 연방 탈퇴 주장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헌법이 미뤄두었던 또 다른 주요 쟁점은 노예제였다. 이 문제는 재산권 개념 속에 암묵적으로 포함되어 주들의 판단에 맡겨졌다. 만약 헌법 제정자들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면, 버지니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비롯한 남부의 여러 주는 새롭게 제안된 연방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식민지 중 가장 부유했던 버지니아가 연방 가입을 거부할 경우, 연방 정부 창설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따라서 매디슨을 비롯한 헌법 제정자들은 남부 주들의 참여와 중앙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부의 이해관계에 상당한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p.238~239
해밀턴주의자들은 정치 성향 면에서는 토리당에 가까웠지만, 경제 개혁의 측면에서는 진보적인 휘그당의 성격을 지녔다. 조지 워싱턴과 존 애덤스John Adams 그리고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정부를 문제의 근원이라기보다는 해결책으로 생각한 이들을 대표했다. 이들은 수입 관세로 재정을 충당하는 강력한 연방 정부가 책임 있는 엘리트들에 의해 운영되고, 점진적 개혁을 주도하는 것이 미국이 완전하 독립을 확보하는 데 필수라고 여겼다. 또한 지배 엘리트는 피지배층의 동의를 얻는 것이 필수적이나, 동시에 재산과 안정을 위협할 수 있는 대중의 급진주의를 경계하였다. 해밀턴주의자들은 다양한 공동체를 연방으로 통합하고, 자유가 번창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데 중앙 정부의 능력을 신뢰했다.
......제퍼슨주의자들은 대중의 정치 참여 확대를 지지한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인 휘그당의 입장이었지만, 농업 중심적 이상이 이전 세기 초반 볼링브로크의 분권 사상과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는 '지방country' 휘그당의 성향을 보였다. ......제퍼슨주의자들은 연방 권력의 확대를 반대하고, 친영국적 성향의 엘리트 계층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상황을 비판하였으며, 해밀턴주의자들이 제시한 것과는 확연히 다른 발전 전략을 구상하였다.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영국의 최근 발전상은 자신들이 결코 원치 않는 미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즉, 사회의 자연적 토대라 할 수 있는 농업 질서는 점점 약화되었으며, 새롭게 등장한 금융 세력이 대지주의 정치적 영향력을 잠식하였다. 토지세는 자영농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켰고, 차입금으로 비대해진 정부는 독재적으로 변했으며, 채무는 사회 질서를 부식했고, 과잉과 소비주의는 사회를 퇴폐적으로 만들었다.
―p.241~242, 244
동화정책은 세 가지 주요 이념적 매개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건국 숭배, 앵글로색슨 신화, 복음주의 개신교였다. 모든 사회는 기원 신화를 만들어 기본 가치체계를 제시하고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기원에 관한 신화를 창조한다. 신화가 모호하고 검증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된다. 즉, 신화는 결코 완전히 반박될 수 없고, 영속성을 가지며, 모호한 특성 덕분에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유연하게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p.315
......유럽에서도 나폴레옹이 대륙의 상당 부분을 강제로―비록 일시적으로―통합한 이후 새롭게 해방된 여러 나라는 각자의 정치적 생존 방안을 찾으려는 노력을 전개했다. 이들은 군사-재정 질서를 재구성할지, 아니면 개혁 또는 폐기를 할지를 놓고 지속적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연방제를 비롯한 다양한 정치 형태를 실험했으며, 중앙 정부와 지역 정부 사이의 적정한 권한 배분, '절대주의' 체제와 대의적 정부 형태 간의 균형 문제를 놓고 논쟁했다. 이들은 제조업과 농업의 상대적 이점을 비교 평가하고, 중상주의와 자유무역 간의 우열을 가리려는 국제 논의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노예제도의 존폐를 포함한 사회 개혁의 필요성도 깊이 고민했다. 정치 참여가 활발해지고 왕조 정통성에 대한 의문이 증가하는 시대 상황에서 이들은 국가 통합의 기반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이 유럽과 같은 '봉건 유산feudal residues' 문제를 처리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공화국이 유럽과 유사한 정치 갈등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남부의 플랜테이션 귀족층과 북부의 상업 엘리트가 벌인 투쟁이 유럽의 보수주의자와 개혁주의자의 갈등과 유사한 맥락에서 나타났다. 더욱이 1800년 이후 정당들 또한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혁명 이후 변화한 세계정세에 맞추어 그들의 정책을 조정했다. 해밀턴주의자는 귀족적 엘리트의 지휘 아래 군사-재정 국가를 재건하려던 희망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다. 권력은 제퍼슨과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어갔고, 그들은 연방 정부의 자원을 활용하는 동시에 주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정치의 영역을 엘리트 집단을 넘어 확장한 '녹색 봉기'를 촉진했다. 잭슨의 뚜렷한 공헌은 연방 기구의 선택적 활용과 주 권력 확대를 결합하여 포퓰리즘의 형태를 동원했다는 데 있었다.
―p.338~339
......돌이켜보면 미국은 예외 없이 전쟁으로 국가와 민족이 형성된다는 명제를 증명해온 대표 사례였다. 그러나 미국은 유럽과 달리, 그와 같은 과정을 정착이 아니라 이동 중에 수행하였다. 18세기 이후 유럽인들은 대개 정착이 이루어진 사회에서 국가를 세우고 이를 기반으로 민족 정체성을 만들어나갔다. 이에 반해 미국은 사람들이나 국경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좀 더 유동적인 신대륙 환경에서 국가 건설 과정을 밟았다. 이러한 환경의 차이는 대외정책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유럽 국가들은 지리적으로 서로 인접해서 빈번한 충돌을 경험했지만, 동시에 갈등을 예방하거나 최소화할 수 있는 협상 기술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반면 미국은 1812년 전쟁 이후 1941년 진주만 공습에 이르기까지 자신에 버금가는 강력한 상대국과 충돌할 일이 없었다. 그 기간에 미국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국가들을 대상으로 몇몇 소규모 전쟁을 치렀다. 이로써 힘과 무력의 효용성에 대한 강한 믿음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신념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p.344~345
국제 관점에서 볼 때, 남북전쟁을 촉발한 문제들은 2장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나폴레옹 이후 유럽에서 보수와 진보 세력 사이에서 벌어졌던 당대의 투쟁과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물론, 미국에는 군주제주의자들이 거의 없었으며, 유럽에는 노예가 훨씬 드물었다. 그럼에도 왕조 체제를 수호하려는 세력과 '개선'을 옹호하는 세력 간 경쟁은 신세계에서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나타났다.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핵심 문제는 18세기 후반 전쟁을 거쳐 등장한 국가 구조를 어떻게 정의하고 통제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북부와 남부는 헌법에 대한 점점 더 상이한 해석을 기반으로 하여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며,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과 논평가들에게 익숙한 유형의 도덕적 당위성으로 각자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그들은 보편 원리와 성경의 권위, 역사적 사례를 근거로 제시하였다. 또한 뚜렷하게 규정되지 않고 반쯤은 상상에 기댄 민족 개념에서 통합의 근거를 찾고자 했다. 그들은 섭리적 운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그것이 평화와 자유, 독립의 약속된 땅으로 자신들을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급진주의로 상징되는 '민주주의의 과도함'을 배척하는 데서는 한목소리를 냈다.
―p.388~389프랑스 혁명 이후 첨예해진 보수주의자와 개혁주의자 간 경쟁은 19세기를 관통하며 지속되었고, 결국 1914~1918년의 또 다른 혁명적 전쟁에서 정점에 도달했다. 가장 보편 관점에서 보면, 이 경쟁은 본질적으로 토지 기발 세력과 도시 기반 세력 간의 대결이었다. 이 오래된 대결에서 주목한 만한 변화는 1918년 무렵 토지 세력이 역사적 패배를 맞았다는 것이다. 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850년 무렵까지 유럽 사회의 이해관계 간 균형은 토지 기반 세력에 여전히 유리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 군사-재정 국가 체제가 재정비 되면서 진보적 개혁 세력의 움직임은 억제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근대 세계화를 추동하는 힘들이 전통적인 부와 권력의 원천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산업 금융상업 서비스에서 창출되는 소득이 농업에서 발생하는 소득을 능가했다. 재정 통합은 중앙 정부의 재원을 확충했다. 국가의 차입 비용이 낮아지면서 복지 지출이 증가하였고, 신생 국가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 계층을 새 사회 관계 속으로 통합할 수 있게 되었다. 투표권 확대는 기존 정치 권력의 기반을 잠식하고 군주의 자의적 권력을 의회 통제로 제약했다. 이러한 전환 과정은 심지어 1914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지연되었고 불완전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 혼란은 복지 지출 확대가 가져온 안정 효과를 압도했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갈등뿐 아니라 도시와 농촌 간 대립도 내부에서부터 전환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서로 다른 전환 단계에 있던 국가들 간의 경쟁은 외부에서 오는 위협으로 작용했다.
—p. 428~429
이런 맥락에서 흔히 간과되지만 주목할 만한 지표가 바로 재정 통합이다. 재정 통합은 정치-경제 결속과 국가의 실질적 역량을 잘 나타내기 때문이다. 공통 통화의 도입 여부, 납세 의무 이행의 정도, 중앙은행 기능을 갖춘 국립은행의 존재 여부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 국가의 수입 잠재력 그리고 전쟁 수행과 영토 확장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물론 재정 통합은 필수 요건이기보다는 선택 가능한 조건이다. 높은 수준의 재정 통합은 자원이 제한된 국가에서도 존재할 수 있으며, 자원이 풍부하지만 제국주의 확장에 대한 의지나 기회가 부족한 국가에서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재정 통합은 잠재적 역량을 판단할 때 유용한 지표로서 제국주의적 팽창을 원하더라도 그럴 능력이 없는 국가와 마음만 먹으면 제국주의 팽창에 필요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를 구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p.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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